성문까지 200보쯤 남았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시오."
리나의 손이 검으로 갔다. 나는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남자가 서 있었다. 숲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도로 옆의 바위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30대 후반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데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가죽 갑옷 위에 짧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허리에 긴 외날도가 걸려 있었다. 칼에 손을 올리지는 않았다.
"검을 뽑을 생각은 없소." 남자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대화를 하러 왔소."
"누구십니까?" 리나가 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현상금 사냥꾼이오. 이름은 카르텐." 남자가 짧게 답했다. 자기 직업을 말하면서 빛이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도로의 주막마다 수배서가 붙어 있소. '왕실 용사를 사칭하여 언약 법관의 공무를 방해한 자.' 란델 영주가 꽤 화가 난 것 같더군."
카르텐의 시선이 나에게로 왔다. 아래위를 훑었다. 가죽 조끼에 검정 점퍼, 카고바지. 검도 없고 갑옷도 없는 차림이었다.
"수배서의 그림과 꽤 닮았소. 특히 그 옷이." 카르텐이 내 점퍼를 가리켰다. "이 대륙에서 저런 옷을 입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던 게 당신이었군요."
"숲에서부터 봤소. 왕실 기사와 나란히 가는 이세계 복장의 남자라. 수배서와 딱 맞았소."
카르텐이 한 발 다가왔다. 리나의 검 손잡이에 힘이 들어갔지만 아직 뽑지는 않았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었소." 카르텐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배서에는 '사칭'이라고 되어 있었소. 그런데 진짜 용사라면 사칭이 아니겠지. 어느 쪽이오?"
"용사가 맞습니다."
내가 말했다. 빛이 나오지 않았다.
카르텐이 내 손등을 봤다. 빛이 없는 걸 확인하고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3초쯤 나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빛이 안 나오는 건 봤소. 하지만 그건 당신이 자기 말을 믿고 있다는 것밖에 증명이 안 되오. 미치광이가 자기가 왕이라고 믿어도 빛은 안 나오거든."
처음이었다. 빛이 안 나왔는데도 통하지 않는 상대가.
산적은 빛이 안 나오는 것을 보고 겁먹었다. 법관은 빛을 확인하고 리나의 왕실 기사 자격을 인정했다. 겔투스는 빛이 안 나오는 것만으로 충분히 믿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빛 시스템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카르텐은 달랐다. 빛이 안 나오는 것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증명을 해주시오." 카르텐이 허리의 칼에 손을 올렸다. "용사가 맞다면 용사다운 면을 보여주시오. 검으로든, 마법으로든."
칼을 뽑았다. 긴 외날도였다. 날이 잘 관리되어 있었고, 칼을 잡는 손이 익숙했다. 이 사람은 칼을 직업으로 쓰는 사람이었다.
리나가 검을 뽑았다. 은빛 검날이 저녁 햇살에 번쩍였다.
"물러나시오." 카르텐이 리나를 보며 말했다. 칼끝이 리나가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었다. "기사님,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소. 용사 본인에게 묻고 있는 거요."
리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든 채 카르텐과 나 사이에 서 있었다.
"이 사람은 제가 호위하고 있는 대상입니다. 물러나십시오."
"기사님이 싸워서 이기면 나는 물러나겠소. 하지만 그건 용사가 진짜라는 증명은 안 돼. 기사가 강한 거지, 용사가 진짜인 건 아니니까."
논리적이었다. 이 남자는 감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상대 중에 가장 냉정한 타입이었다.
"리나 기사. 잠깐."
내가 말했다. 리나가 돌아봤다. 눈이 좁아져 있었다.
"검을 내리세요."
"...뭐라고요?"
"싸워서 이겨봤자 의미가 없다고 했잖습니까. 이 사람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리나의 턱이 굳었다. 하지만 3초 뒤에 검을 내렸다. 완전히 칼집에 넣지는 않았지만, 공격 자세는 풀었다.
카르텐이 나를 봤다. 흥미로운 눈이었다.
"좋소. 그럼 보여주시오."
"칼을 내리세요."
카르텐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가 왜?"
"제가 증명하겠다고 했으니까요. 다만 검이 아니라 말로 증명하겠습니다."
카르텐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예상 밖의 상황을 즐기는 웃음이었다.
"말로?"
"네. 그리고 제 말이 끝난 뒤에도 칼을 뽑고 싶으시면, 그때 뽑으십시오."
카르텐이 5초쯤 나를 봤다. 칼끝이 아직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뒤에서 성문의 검문 줄이 느리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텐이 칼을 내렸다. 칼집에 넣지는 않았지만 칼끝이 땅을 향했다.
"들어보겠소."
"감사합니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말했다. "카르텐 씨, 저를 잡으면 은화 30닢입니다. 맞습니까?"
"그렇소."
"란델까지 저를 끌고 가야 받을 수 있겠지요?"
"영주의 대리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되오."
"크롬홀에도 영주의 대리인이 있습니까?"
카르텐이 잠깐 생각했다.
"크롬홀은 자치 도시니까... 없을 거요. 란델까지 가야 하겠지."
"란델까지 이틀 걸리고, 돌아오는 데 또 이틀입니다. 왕복 나흘. 그 사이에 남쪽에서 마왕군이 올라오고 있다는 건 아시겠지요?"
카르텐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첫 번째 반응이었다.
"마왕군이 크롬홀 방향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소."
"소문이 아닙니다. 왕실 기사의 정보입니다."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 진짜 사실이었다.
"나흘 뒤면 이 도로가 안전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를 란델까지 끌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왕군과 마주치면, 은화 30닢이 당신 목숨값이 되는 겁니다."
카르텐이 입을 다물었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요."
"물론입니다. 판단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자, 이제 반대쪽을 보겠습니다. 제가 진짜 용사라고 가정해보세요."
"가정이오?"
"네. 만약 제가 진짜 용사인데 당신이 영주에게 넘겼다면, 왕실이 소환한 용사를 지방 영주가 잡아둔 셈이 됩니다. 왕실에서 용사를 찾기 시작하면, 영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카르텐의 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용사를 잡아 넘긴 사냥꾼은요?"
"...난 수배서대로 한 것뿐이오."
"수배서에는 '사칭범'이라고 되어 있지요. 하지만 진짜 용사를 사칭범으로 잡아 넘겼다면, 수배서를 발행한 영주가 문제가 되고, 그 수배서를 실행한 사냥꾼도 문제가 됩니다."
카르텐이 칼을 쥔 손을 바꿨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를 잡으면 은화 30닢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란델까지의 왕복이 나흘이고, 마왕군이 올라오고 있고, 제가 진짜 용사라면 왕실과 충돌하게 됩니다. 은화 30닢에 목숨과 왕실을 걸 가치가 있는지, 판단은 카르텐 씨 몫입니다."
카르텐이 나를 봤다. 10초쯤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진짜 용사가 아닌 경우는?"
"그러면 은화 30닢을 벌겠지요. 다만 마왕군 문제는 똑같습니다."
카르텐이 한숨을 내쉬었다. 짧고 낮은 한숨이었다. 칼을 칼집에 넣었다.
"당신, 좀 이상한 사람이오."
리나가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닙니다."
"용사라면 칼이나 마법으로 증명하면 될 것을 말로 하려 하고, 현상금 사냥꾼한테 검을 내리라고 하고, 증명 대신 손익 계산을 들이밀고." 카르텐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용사는 처음이오."
"저도 용사는 처음입니다."
카르텐이 잠깐 나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의 냉정한 표정과는 다른, 좀 더 편한 얼굴이었다.
"30닢은 포기하겠소. 대신 한 가지 물어보겠소."
"말씀하세요."
"크롬홀에 가는 거요?"
"네."
"나도 크롬홀에 갈 일이 있소. 마왕군 소문 때문에 남쪽 도로 쪽 일감이 늘었거든. 성문까지 같이 가도 되겠소?"
뒤에서 리나가 내 팔을 잡았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30닢을 포기할 정도면 계산이 맞았다는 뜻입니다."
리나가 2초쯤 카르텐을 봤다. 카르텐은 양손을 벌려 보이며 기다렸다.
"...칼에서 손을 떼고 걸으십시오."
카르텐이 양손을 머리 뒤로 올리며 걸기 시작했다. 과장된 동작이었지만, 적의는 없어 보였다.
셋이서 성문 쪽으로 걸었다. 해가 성벽 뒤로 기울고 있었고, 검문 줄이 짧아져 있었다.
"그런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소?"
카르텐이 걸으면서 말했다.
"네."
"아까 그 손익 계산. 전부 맞는 말이었소?"
"맞는 말이었습니다."
빛이 나오지 않았다.
카르텐이 내 손등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전방을 봤다.
"빛이 안 나왔으니까 진짜겠지. 물론 미치광이가 자기 말을 믿는 것일 수도 있지만."
카르텐이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성문이 가까워졌다. 크롬홀의 성벽은 란델과는 비교가 안 되게 높았고, 성문 양쪽에 자경단원이 서 있었다. 창과 가죽 갑옷 차림인데, 표정이 피곤해 보였다.
리나가 왕실 기사 신분을 밝히자 검문이 빨라졌다. 카르텐은 따로 자기 이름을 대며 통과했다. 현상금 사냥꾼이 이 성에서 낯선 존재는 아닌 모양이었다.
성문을 지나 크롬홀 안으로 들어섰다. 도로 양쪽에 가게가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이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란델보다 확실히 컸다. 냄새도 달랐다. 흙과 풀이 아니라 연기와 철이 섞인 냄새였다.
카르텐이 갈림길에서 멈췄다.
"나는 이쪽이오. 남쪽 도로 쪽에 숙소가 있소."
돌아서려다가 멈추고 나를 봤다.
"태호라고 했소?"
"이름은 말한 적 없는데요."
"수배서에 없었소. 기사님이 아까 '태호 님'이라고 부른 걸 들었소."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숲에서 따라오면서 대화까지 듣고 있었다.
"또 보겠소, 용사 양반."
카르텐이 손을 흔들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외날도가 망토 아래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리나가 나를 봤다.
"위험한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빛이 안 나와도 안 믿는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도요."
리나가 전방을 보며 걸었다. 성 안의 큰 도로를 따라가면 시장이 보일 것이다. 주막도 있을 것이고, 오늘 밤은 지붕 아래에서 잘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아까 손익 계산."
리나가 걸으며 말했다.
"네."
"마왕군이 나흘 안에 이 도로까지 온다는 건 사실입니까?"
"모릅니다.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나흘 안에 도로까지 오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리나가 나를 봤다. 한숨 반, 인정 반의 표정이었다.
"그래서 빛이 안 나온 거군요."
"네. 전부 사실인 부분도 있고, 제가 믿는 부분도 있고, 약간 부풀린 부분도 있습니다."
"약간이요?"
"약간입니다."
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