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인데 입만 살았습니다
5화

법관이 도장을 거두며 다음 서류를 꺼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땅을 빼앗긴 농부가 물러나자, 다른 사람이 탁자 앞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였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아이의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다음. 카이사 밭, 경작권 검증."


법관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여전히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내 땅에서 나는 것의 반을 세금으로 내겠습니다.' 이것이 당신 남편의 언약이었지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작았다.


"남편이 작년에 죽었습니다. 저는 그 언약을 이어받아 올해도 반을 냈는데 —"


"언약은 '내 땅'이라 했습니다." 법관이 잘라 말했다. "'내'는 당신 남편을 가리킵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내 땅'이라는 전제가 소멸했고, 따라서 이 땅의 경작권은 원소유자인 영주에게 반환됩니다."


"하지만 저도 그 땅에서 10년을 —"


"언약에 당신 이름은 없습니다."


여자의 입이 닫혔다. 등에 업힌 아이가 칭얼거렸지만 여자는 달래지 못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나서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아는 눈이었다.


리나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는 광장 쪽으로 걸었다.


"잠깐만요."


법관이 올려다봤다. 호위 둘이 동시에 내 쪽을 봤다. 칼에 손이 갔다.


"뭐요?"


"이 해석에 문제가 있습니다."


법관의 눈이 좁아졌다.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가죽 조끼에 검정 점퍼,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바지. 농민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차림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여행자입니다. 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재판을 보게 됐는데, 좀 이상해서요."


법관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상한 점을 말해보시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아이를 업은 여자가 올려다봤다. 리나가 내 뒤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 땅에서 나는 것의 반을 세금으로 내겠습니다.' 이 언약에서 핵심은 세금을 내겠다는 약속이지, '내'가 누구냐가 아닙니다."


법관의 눈썹이 올라갔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계속하시오."


"남편이 죽었지만 아내가 땅을 이어받아 세금을 냈습니다. 언약의 목적은 세금 납부였고, 그 목적은 이행되고 있습니다. '내'라는 단어를 화자 개인에 한정하는 해석은 언약의 본래 취지를 벗어납니다."


법관이 서류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읽는 시늉을 했지만,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흥미로운 해석이오. 하지만 틀렸소."


여유롭게 말했다.


"언약은 문자 그대로 해석됩니다. '내 땅'에서 '내'는 화자인 남편을 가리킵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내'의 지시 대상이 소멸했고, 따라서 언약 자체가 효력을 잃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 해석이 아니라, 언약 법관 규범 제3조에 명시된 원칙입니다."


"원칙이라고요. 누가 만든 원칙입니까?"


"왕실이 인정한 언약 법관 위원회입니다."


"그럼 그 위원회의 해석이 절대적이라는 뜻입니까?"


법관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얇은 미소였다.


"그렇습니다. 언약의 해석은 법관의 권한이며, 법관의 해석은 왕실의 위임을 받습니다. 평민이 법관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려면 왕실에 직접 상소를 해야 하는데..." 법관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 마을에서 왕도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 닷새는 걸리지요. 상소를 하는 동안 경작권은 정지됩니다. 상소 기간 동안 농사를 짓지 못하면 빚이 늘고, 빚이 늘면 다음 언약도 파기 사유가 됩니다."


내 등 뒤에서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더 숙이는 게 느껴졌다. 이미 알고 있는 구조였다. 반박하면 더 잃는다는 걸.


"그리고."


법관이 인장을 집어 들었다.


"당신의 해석은 흥미롭지만,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해석권은 법관에게 있으니까요. 여행자의 의견으로는 판결을 바꿀 수 없소."


도장이 서류에 찍혔다. 인장이 종이에 닿는 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나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반박할 논리는 있었다. 언약의 취지와 목적을 따지면 내 해석이 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합리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의 해석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이, 도장을 찍을 권한이 이 사람에게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도장을 막을 권한이 없었다.


법관이 여자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들었는데, 서류 맨 아래에 '경작권 반환 동의'라는 문구가 찍혀 있는 게 보였다. 여자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법관의 호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자는 고개를 떨구고 무언가에 손도장을 찍었다. 법적 동의까지 받는 절차가 있었다. 이 사람은 빈틈없이 일하고 있었다.


산적 두목은 내 말에 손해와 이득을 계산했다. 겔투스는 내 말에 사업 기회를 봤다. 둘 다 내 말의 내용에 반응한 것이다.


이 법관은 달랐다. 내 말의 내용이 아니라, 내 말의 자격을 봤다. 여행자의 해석은 법적 효력이 없다. 아무리 논리가 정확해도 도장을 찍을 자격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아이를 업은 여자가 고개를 떨구며 탁자에서 물러났다. 옆에 서 있던 농부가 여자의 팔을 잡아줬다.


"다음."


법관이 다시 서류를 넘겼다. 세 번째 건이었다. 줄을 서 있는 사람이 아직 네 명이나 있었다.


나는 리나 쪽으로 돌아왔다. 리나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안 됐습니까?"


"안 됐습니다."


"논리가 틀렸습니까?"


"논리는 맞았을 겁니다. 문제는 논리가 아니라 권한이에요. 도장을 찍는 건 저 사람이니까."


리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검 손잡이 위의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 아버지도."


낮은 목소리였다. 나를 보지 않고, 법관의 탁자를 보며 말했다.


"비슷한 일을 당했습니다. 언약의 해석이 뒤틀려서, 지키고 있던 맹세가 파기됐다고 판정받았습니다."


리나가 시선을 돌렸다. 눈이 빨개져 있었지만 울고 있지는 않았다.


"법관이 해석하면 그게 법이 됩니다. 칼로는 안 됩니다. 그건 반역이에요."


"말로도 안 됐습니다."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나쁘다는 표정이었다.


광장에서 세 번째 농부가 고개를 떨구고 물러나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늙은 남자였는데, 물러나면서 옆에 서 있던 아들로 보이는 젊은이에게 고개를 저었다. 젊은이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팔을 잡았다. 법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주막 쪽을 봤다. 간판이 걸려 있었다. 글자는 읽을 수 없었지만 술잔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곳이겠지.


"리나 기사."


"네."


"오늘은 여기서 쉬어도 됩니까?"


리나가 나를 봤다. 크롬홀까지 하루 반인데 왜 여기서 멈추느냐는 눈이었다.


"저 법관, 줄이 네 명 남아 있었습니다."


리나의 눈이 달라졌다.


"내일도 올 겁니다. 오늘로 끝이 아닐 테니까."


"말로 안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말로는 안 됐습니다."


나는 탁자 뒤의 법관을 다시 봤다. 비단 옷, 인장, 호위 둘. 도장을 찍는 권한. 그리고 그 권한의 출처 — 왕실의 위임.


"법관의 해석이 왕실의 위임이라고 했지요?"


"예."


"그럼 왕실의 직접 명령은 법관의 해석보다 위에 있겠지요?"


리나가 멈칫했다.


"...그건."


"저는 왕에게 직접 언약을 받은 용사입니다. 왕이 직접 한 언약은 법관의 해석보다 상위겠지요?"


리나의 눈이 흔들렸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이 사람이 이런 눈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법리상으로는 맞습니다. 왕의 직접 언약은 위임된 해석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왕이 당신에게 한 언약은 '마왕을 쓰러뜨리면 돌려보내주겠다'는 것이지, 이 마을의 경작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를 만들면 됩니다."


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3초쯤 나를 보다가 말했다.


"또 말빨입니까?"


"네. 근데 이번에는 혼자서는 안 됩니다."


리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저한테도 역할이 있다는 뜻입니까?"


"당신은 왕실 기사입니다. 왕실의 권위가 필요해요. 제 입에서 나오면 여행자의 허세지만, 왕실 기사의 입에서 나오면 공식적인 경고가 됩니다."


리나가 광장을 봤다. 법관이 네 번째 서류를 펼치고 있었다. 또 누군가의 땅이 사라지려는 참이었다.


"거짓말을 하라는 겁니까?"


"아뇨. 사실만 말하면 됩니다. 거짓말은 제가 합니다."


리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한숨이라기보다는, 뭔가를 인정하는 쪽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주막이 어디 있습니까?"


"저쪽에 술잔 모양 간판이 보입니다."


리나가 걸음을 옮겼다. 나도 따라 걸었다.


주막에 들어서니 넓지 않은 홀에 탁자가 다섯 개쯤 있었다. 손님은 한 명뿐이었는데, 구석에서 술을 마시며 우리를 힐끗 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방을 잡고 짐을 풀었다. 리나가 검을 벽에 기대고 창문 쪽에 앉았다. 광장이 보이는 자리였다. 법관이 아직 탁자에 앉아 있었다. 네 번째 서류에 도장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내일은 다릅니다."


내가 말했다. 리나가 나를 봤다. 의심하는 눈이었지만 듣고 있었다.


"오늘 진 건 권한이 없어서입니다. 논리로 진 게 아니에요."


"권한을 어떻게 만들 겁니까?"


"그건 지금 생각 중입니다."


리나의 한숨이 들렸다. 하지만 자리를 뜨지 않았다. 창밖을 보며, 법관이 마지막 서류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법관이 호위를 거느리고 광장을 떠났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 이 마을에서 몇 사람이 땅을 잃었을까. 내일은 또 몇 명일까.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법관의 해석권은 왕실의 위임이다. 위임은 직접 권한보다 하위에 있다. 왕이 나에게 직접 한 언약이 있다. 문제는 그 언약과 이 마을의 경작권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는 것이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