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인데 입만 살았습니다
3화

아침이 왔다.


객실 침대는 푹신했지만, 나는 거의 잠을 못 잤다. 생전 처음 보는 천장, 돌벽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 달이 두 개인 하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새벽에 배달 다니느라 수면이 짧은 건 익숙했지만, 불안해서 못 자는 건 다른 문제였다.


세수를 하고 나오니 도란이 회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용사님, 폐하께서 호위 기사를 배정하셨습니다. 여정에 필요한 장비도 함께 준비되어 있습니다."


"빠르시네요."


"300년 만의 소환입니다. 왕궁이 느긋할 수 없지요."


느긋할 수 없다기보다는 빨리 내보내고 싶은 거겠지. 적성 최하위 용사가 왕궁에 오래 머물면 소문이 퍼질 테니까. "천 명을 지휘한 장군"이라는 거짓말이 먹혔지만, 내가 실제로 뭘 하는지 보여줄 기회가 생기기 전에 보내는 게 낫다는 판단일 것이다.


도란을 따라 회랑을 걷는데, 복도 모퉁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관리복 차림의 남자 둘이 서 있다가 나를 보고 말을 끊었다. 시선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경외도 경멸도 아닌, 이게 그 용사인가 확인하는 눈이었다. 나를 지나친 뒤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아도 내용은 짐작이 갔다.


도란이 나를 성 뒤편의 작은 마당으로 안내했다. 정문이 아니었다. 위병이 서 있긴 했지만 장식 없는 실무용 출입구였다. 환송 따위는 없다는 뜻이었다.


마당에 마차 한 대와 짐이 실린 수레가 서 있었다. 마차 옆면에 왕실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 하나가 마차 옆에 서 있었다.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존재감이 컸다. 은발에 가까운 밝은 금발이 턱선에서 깔끔하게 잘려 있었고, 갑옷 위에 망토를 걸친 차림이었다. 검을 등에 비스듬히 차고 있었는데, 서 있는 자세부터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눈이 크고 날카로워서 처음 보는 인상은 차가웠다.


나를 보자, 정확히는 내 차림을 보자, 눈썹이 미세하게 찡그러졌다.


"이분이 호위 기사 리나 카셀입니다."


도란이 소개했다. 리나가 고개를 숙이는 시늉만 했다. 인사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리나 카셀, 왕국 기사단 소속입니다. 용사님의 여정을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목소리가 단단했다. 깔끔하게 잘라 말하는 타입이었다. 감정은 표정이 아니라 눈에 들어 있었는데, 그 눈이 지금 나를 좋아하고 있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강태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악수도, 추가 인사도 없었다. 리나는 시선을 돌려 마차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짐의 끈을 확인하고, 바퀴의 상태를 살피고, 수레 위의 장비 목록을 세는 동작이 빈틈없이 이어졌다.


도란이 내 옆으로 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나 기사는 실력이 뛰어납니다. 다만 성격이 조금 곧아서, 용사님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곧은 성격이라기보다 나를 경멸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첫 만남에서 이 정도의 적의를 보이는 건 뭔가 사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리나가 말했다. 도란에게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에게는 마차 위를 턱으로 가리켰다.


도란이 마당 끝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 눈에 걱정이 있었다. 어제 옥좌실에서 내 거짓말 덕에 위기를 넘긴 사람이었으니, 최소한 악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차가 왕궁 뒷문을 빠져나왔다. 도시의 뒷골목을 지나 성벽의 작은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300년 만의 용사인데, 출발이 이렇게 조용했다.


성벽 밖은 넓은 들판이었다. 도로 양옆으로 경작지가 펼쳐졌고, 먼 곳에 숲이 보였다. 하늘이 높고 구름이 적었다. 어젯밤의 두 개의 달은 사라지고, 태양은 하나였다. 그건 조금 안심이 됐다.


이세계의 낮을 처음 보는 거였다. 밤의 신전과 옥좌실만 보다가 나오니, 하늘의 넓이가 달랐다. 바람에 풀 냄새가 섞여 왔는데, 서울에서 맡던 매연과 기름 냄새가 아니라 진짜 풀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현실감을 줬다. 꿈이 아니라는 걸 코가 확인시켜주는 느낌이었다.


리나는 마차 옆에서 걸었다. 말을 탈 수 있었을 텐데 걷고 있었다. 경계하는 거였다. 주변을 살피는 시선이 쉬지 않았고, 등에 맨 검의 손잡이에 손이 가까이 있었다.


한참을 침묵 속에 달린 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남쪽으로. 크롬홀이라는 마을이 첫 거점입니다. 사흘은 걸립니다."


"마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더 남쪽에. 정확한 위치는 정찰이 필요합니다."


대화가 끊겼다. 리나는 말이 적은 게 아니라, 나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질문에는 답하지만 한마디도 더하지 않았다.


"리나 기사."


"네."


"혹시 제가 무슨 기분 나쁜 짓을 —"


"아뇨."


잘랐다. 그리고 한 박자 뒤에 말을 이었다.


"다만, 폐하의 명이 아니었다면 이 임무를 맡지 않았을 겁니다."


솔직했다. 불쾌하지만 솔직한 건 차라리 나았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물으려는데 — 리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맹세 도둑 같은 자와 동행하라니."


맹세 도둑?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감으로 짐작이 갔다. 거짓 맹세를 하는 사람, 혹은 맹세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았다. 어제 왕 앞에서 한 거짓말이 어떻게든 걸린 건가?


"왜 맹세 도둑입니까?"


리나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어제 폐하 앞에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천 명을 지휘한 장군이라고. 적성은 최하위인데 전략과 기만으로 싸웠다고."


심장이 한 번 뛰었다. 들켰나? 아니, 빛은 나오지 않았다. 들킨 게 아니라...


"빛은 나오지 않았으니 거짓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리나가 나를 봤다. 눈이 차가웠다.


"기만으로 싸운다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세계에서 맹세와 언약은 목숨입니다. 그걸 전략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맹세의 무게를 모르는 겁니다."


그제야 이해했다. 리나는 내 거짓말을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내 진짜 말을 싫어하는 거였다. "기만으로 싸웠다"는 내 말이 이 세계에서는 "나는 맹세를 도구로 쓰는 인간입니다"와 같은 의미인 모양이었다.


아이러니했다. 거짓말은 들키지 않았는데, 거짓말 속에 섞어 넣은 진짜 의도가 문제였다.


리나의 태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리나의 시선이 갑자기 왼쪽 숲으로 꺾였다.


"멈추세요."


마차가 섰다. 리나가 등의 검을 뽑았다. 동작이 빨랐다. 보이기 전에 이미 검이 손에 있었다.


숲에서 소리가 났다. 덤불이 흔들리고, 무거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걸음의 간격이 불규칙하고, 낮은 울음소리 비슷한 게 섞여 있었다.


리나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려다 멈췄다. 내려서 뭘 할 수 있지? 숲 가장자리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덩치가 컸다.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피부가 회녹색이었으며, 뭉툭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눈이 작고 이마가 좁았다. 뒤로 세 마리가 더 나왔다. 네 마리였다.


리나가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맹세의 서. 이 자리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


검날에 빛이 감겼다. 은빛에 가까운 마나가 칼날을 따라 흘렀고, 리나의 눈이 달라졌다. 차가운 눈이 아니었다... 태우는 눈이었다.


첫 번째가 몽둥이를 내리쳤다. 리나가 옆으로 빠지면서 상향 베기로 팔을 잘랐다. 몽둥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서며 두 번째의 옆구리를 찔렀다. 세 번째가 돌진했는데 리나가 검을 비틀어 몽둥이를 흘려보내고 이마를 가격했다. 네 번째가 도망쳤다.


10초도 안 걸렸다.


나는 마차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검을 잡아본 적도 없고, 저런 생물을 본 적도 없고, 리나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는 것조차 겨우였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까 리나가 "맹세 도둑"이라고 했을 때는 안 떨렸는데, 진짜 위험 앞에서는 몸이 솔직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고, 등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리나가 검에 묻은 피를 털고 칼집에 넣었다. 호흡이 약간 빨라져 있었지만 상처는 없었다.


그리고 나를 봤다.


"용사라면서요?"


목소리에 경멸이 있었다.


"한 가지라도 직접 해보시죠."


대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리나가 시선을 거두고 전방을 살폈다. 표정이 굳었다.


"용사님."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경멸이 아니라 경계였다.


"앞에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보였다.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나무 바리케이드,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무장한 사내들이 대여섯 명쯤 됐다. 도끼와 낡은 검을 들고 있었고, 갑옷은 없지만 가죽 조끼를 입고 있었다.


산적이었다. 혹은 그 비슷한 것이었다.


리나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아까 네 마리를 상대한 직후라 체력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대가 사람이었다.


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마차의 문양을 보고 씩 웃었다.


"왕실 마차? 그럼 용사님이시겠군. 통행세를 내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