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인데 입만 살았습니다
23화

마을에서 빵과 말린 고기를 샀다. 은 두 닢이 들었다. 남은 돈의 절반이었다. 노인이 덤으로 사과 네 개를 넣어줬다. 전쟁과 무관한 곳에 사는 사람들의 여유였다.


"남쪽 산길은 오래된 길이오." 노인이 말했다. "사람이 안 다닌 지 오래요. 중간에 옛날 건물이 있는데, 거기 넘어가면 내리막이오."


"옛날 건물이요?"


"돌로 된 거요. 아주 오래된. 조상들 시절에 뭔가 있었다는데, 우리도 잘 모르오. 근처에 가면 기분이 이상해진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안 가오."


기분이 이상해진다. 마나와 관련된 건물일 수 있었다. 크롬홀 성벽에서 본 마법진이 떠올랐다. 노르도의 이름과 탑의 인장.


리나에게 눈짓했다. 리나가 끄덕였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리나가 물통을 채우고, 나는 핀의 약도를 확인했다. 이 마을은 약도의 끝자락이었다. 여기서 남쪽은 핀도 정찰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약도를 접어 넣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직접 보고 판단해야 했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노인의 말대로 오래된 길이었다. 돌계단이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이끼가 덮여 있고 나무뿌리가 사이사이를 뚫고 있었다. 한때는 정비된 길이었다는 흔적. 누가, 어디로 가기 위해 만든 길이었을까. 사과를 하나씩 먹으며 걸었다.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전쟁 중에 먹는 사과는 이상하게 달았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숲이 얇아졌다. 나무 사이로 남쪽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줄기가 이어지고, 그 너머로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에 가까운 곳에 뭔가가 솟아 있었다. 탑처럼 보이는 것. 거리가 멀어서 확실하지 않았지만, 보이는 것은 확실했다.


"저건 뭡니까?"


리나가 남쪽을 보고 있었다. "마왕성입니다. 아마."


마왕성.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아직 멀었다. 하지만 보인다는 것 자체가 여정의 규모를 체감하게 했다. 크롬홀에서 출발한 지 닷새. 그 사이에 검문소를 통과하고 주민을 구출하고, 마왕군 최강의 장수가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 탑까지 가야 한다. 적성 최하위가.


반나절을 더 걸으니 숲 속에 건물이 나타났다. 노인이 말한 '옛날 건물'이었다.


돌로 된 구조물이었다. 벽이 세 면 남아 있었고, 지붕은 무너져 있었다. 크기는 크롬홀의 자경단 본부보다 작았지만, 돌의 질이 달랐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표면이 수백 년의 풍화를 견뎌낸 것이었다. 입구처럼 보이는 곳에 돌기둥 두 개가 서 있었다. 높이가 사람 키의 두 배쯤 되었다. 기둥 표면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글씨인지 문양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끼와 풍화로 대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노인이 말한 '기분이 이상해진다'는 것이 이해됐다. 유적 근처에 서니 피부가 따끔거렸다. 마나가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내 마나 감각은 원래 둔했다. 적성 최하위이니까.


리나가 먼저 들어갔다. 검을 빼지는 않았지만, 손은 손잡이 위에 있었다. 안에서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벽이 세 면을 감싸고 있어서 바깥보다 어두웠다. 하지만 무너진 지붕 사이로 햇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빛이 벽면을 비추고 있었다.


벽면에 글씨가 있었다. 이끼 아래에 가려져 있었지만, 햇빛이 비추는 부분은 읽을 수 있었다. 이 세계의 문자였다. 소환된 뒤부터 읽을 수 있게 된, 이 세계의 언어.


첫 번째 벽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서약의 탑이 왕을 만들고, 탑이 적을 만든다. 탑이 원하는 한, 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읽고 다시 읽었다. 탑이 왕을 만든다. 탑이 적을 만든다. 순환. '만들어진 마왕'이라는 핀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마왕은 탑이 지정한 것이다. 그리고 용사도 탑이 소환한 것이다. 나를 이세계로 데려온 빛도 탑에서 나온 것이었다. 탑이 원하는 순환. 왕과 적이 싸우는 순환. 300년마다 반복되는 것.


마왕군 병사가 말했다. "마왕님은 원래 학자이셨는데." 학자가 자발적으로 마왕이 되었을까. 이 벽면이 맞다면, 탑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의 말과 이 비문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번째 벽으로 갔다. 이 쪽은 이끼가 적었다. 글씨 옆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원 안에 탑의 형상. 크롬홀 성벽에서 본 마법진의 문양과 같았다. 그 아래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탑의 관리자 노르도.'


같은 이름이었다. 크롬홀의 마법진에도 이 이름이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구이고, 왜 여기저기에 이름을 새겨놓은 것일까.


리나가 옆에서 벽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눈이 벽면 위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 번째 벽은 가장 안쪽이라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리나가 벽 가까이 가서 이끼를 손으로 걷어냈다. 그 아래에 글씨가 나타났다.


벽면에 소환진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원과 선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문양으로, 왕궁 신전에서 깨어났을 때 발 아래에 있던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소환진 자체가 아니라, 소환진의 잔해처럼 보였다. 금이 가 있었고, 일부가 깎여 나가 있었다. 의도적으로 파괴한 흔적.


그 옆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용사는 돌아가지 못했다. 탑이 허락하지 않았다.'


읽고, 다시 읽고, 한 번 더 읽었다.


용사는 돌아가지 못했다.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을 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빠르기. 이건 공포였다.


벽에서 한 발 물러서며 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옛날 기록이다. 지금도 같은 규칙이 적용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신관의 눈빛이 떠올랐다. 리나가 말한 것도. 세 개의 조각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용사님."


리나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리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쓰는 건 처음이었다.


"옛날 기록입니다."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온하게 나왔다. "지금도 같은지는 모릅니다."


리나가 나를 봤다. 빛은 나오지 않았다.


"네." 리나가 말했다.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유적을 나오자 햇빛이 따뜻했다. 방금 읽은 글씨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지만, 발은 남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떠올랐다. "밥 먹었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 어머니의 답장: "이 시간에 무슨 밥. 들어와서 자."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아니고,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산길이 내리막으로 바뀌자 남쪽 풍경이 넓어졌다. 멀리 보이던 마왕성이 조금 더 커져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리막을 걸으면서 리나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벨카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


리나가 말했다. 내 생각과 같았다.


"산길로 계속 가면 마주칠 확률은 낮습니다. 벨카가 도로를 따라 이동한다면."


"도로를 따라 이동하지 않는다면요?"


대답하지 못했다. 마왕군 최강의 장수가 산길까지 뒤질 정도로 집요하다면, 말빨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리나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돌아보지 않은 채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대답하지 않았다.


발을 내디뎠다. 남쪽으로. 등 뒤에 유적이 작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