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새벽 두 시의 빗줄기는 차갑고 집요했다. 헬멧 위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귀 안에서 울렸고, 장갑 끝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손가락이 곱았다. 3월 초의 비는 겨울과 봄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차가웠다.
아파트 현관에서 떡볶이와 음료를 건넸다. 문을 연 남자는 트레이닝복 차림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게임이든 야근이든, 이 사람은 잠을 잘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 문을 여는 속도가 빨랐고, 배달 음식을 받는 동작이 익숙했다. 상습 주문자였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돌아섰다. 새벽 두 시에 떡볶이를 시키는 사람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었다. 내 사정도 충분히 복잡했다.
오토바이로 돌아와서 배달 앱에 완료를 찍었다. 이번 달 야간 배달만 23건째였다. 이 건까지 합쳐서 새벽 수당을 포함해도 아직 부족했다. 이번 달 이자가 180만 원인데, 주중 낮 보험영업과 주말 중고차 판매를 합쳐도 120이 한계였고, 부족한 60은 이렇게 새벽을 깎아서 메꿔야 했다. 아버지가 남긴 빚이었다. 원금은 줄지 않았고, 이자는 매달 왔고, 나는 매달 그걸 갚았다.
오토바이 위에 앉은 채 카톡 창을 열었다.
"밥 먹었어."
보냈다. 거짓말이었다. 자정부터 세 건을 돌았는데 밥 먹을 틈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 시간에도 깨어 있을 거고,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을 게 뻔했다. 물어보기 전에 답을 주는 편이 서로 편했다.
답장이 바로 왔다.
"이 시간에 무슨 밥. 들어와서 자."
새벽 두 시에 답장이 바로 오는 어머니였다. 아들이 자는지 깨어 있는지 모르면 잠이 안 오는 사람이었다. 나는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잠이 부족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고마워"라고 치다가 지웠다. 이런 말을 보내면 어머니가 또 걱정한다.
들어가서 자고 싶었지만 더 돌아야 했다. 이번 달 목표까지 아직 7만 원이 남았다. 배달 앱을 새로고침했다. 화면에 새 건이 뜨기를 기다리며 장갑을 벗고 손에 호호 입김을 불었다. 손가락 끝이 감각이 없었다.
몇 건만 더. 7만 원이면 끝이다.
시동을 걸었다. 핸들을 잡으려는데 —
빛이 왔다.
비 오는 새벽 주택가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빛이었다. 방향은 아래였다. 아스팔트 위에 문양 같은 것이 번지면서, 광원도 없이 저절로 빛을 뿜어냈다.
"뭐야 이 —"
말이 끝나기 전에 몸이 떠올랐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줬지만 손가락이 하나씩 풀렸다. 오토바이가 쓰러지는 소리가 멀어지고, 헬멧 바이저를 통해 하얀 빛이 필터링되어 시야를 채웠다. 빗소리, 새벽의 차가운 공기, 전부 한꺼번에 사라졌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등 아래에 차가운 돌바닥이 있었다.
머리가 울렸다. 귓속에서 높은 소리가 가늘게 빠져나가고 있었고, 속이 뒤집힐 듯 메스꺼웠다. 눈을 뜨니 시야가 흔들렸다가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천장이 높았다. 터무니없이 높았다. 돔 형태의 석조 천장에 빛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전등이 아니었다. 천장에 새겨진 문양 자체가 빛을 내고 있었다. 비 냄새는 사라지고 건조하면서 서늘한 공기만 남았다.
"용사여!"
낯선 공간에서 처음 들은 소리는 한국어였다. 정확히는, 한국어처럼 들리는 무엇이었다. 뜻이 바로 이해되니까 한국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흰 로브를 걸친 노인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머리가 희고, 수염이 턱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얼굴 전체가 감격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300년... 300년 만입니다! 서약의 탑이 응답했습니다!"
노인 뒤로 비슷한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열댓 명쯤 서 있었는데, 노인이 외치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마를 돌바닥에 찧는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렸다. 촛불이 제단 양옆으로 줄지어 타고 있었고, 벽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성당 같기도 하고 신전 같기도 한 공간이었는데, 양식 자체가 내가 아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헬멧이 아직 머리에 있었고, 검정 점퍼에 빗물이 배어 있었다. 카고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더듬었지만 화면이 안 켜졌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피곤하면 이상한 꿈도 꾸는 법이니까. 하지만 등을 누르는 돌바닥의 감각이 너무 선명했고, 공기의 질이 완전히 달랐으며, 배달 바람막이 안쪽까지 스며든 빗물의 축축함은 5분 전의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의 눈물이 너무 진짜였다.
"저기요."
노인이 외침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아르케나 왕국의 신전입니다. 저는 대신관 도란이라 합니다. 서약의 탑이 마나의 균형이 무너졌음을 감지하여, 이세계에서 용사를 소환한 것입니다. 300년 만의 소환이며, 당신이 바로 그 —"
"잠깐만요. 마나? 소환? 용사?"
설명이 길었다. 도란은 흥분해서 말이 많았고, 나는 핵심만 추렸다. 요약하면 이랬다. 300년 주기로 마나라는 에너지의 균형이 무너지면 마왕이라는 존재가 지정되고, 그에 맞서 싸울 용사를 다른 세계에서 불러들인다. 서약의 탑이라는 것이 소환을 담당하며, 내가 그 소환에 끌려온 존재라고 했다. 설명하는 동안 도란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눈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성실하지만 감정에 흔들리는 타입이었다. 윗사람 앞에서 약해지는 부류.
미쳤다. 이건 미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친 상황에서 먼저 무너지면 지는 법이었다. 보험을 팔면서 문전박대를 당해도, 중고차를 팔면서 말도 안 되는 값을 불러도, 무너지면 거기서 끝이었다. 일단 끝까지 듣고, 파악하고, 빈틈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는 나중에 물어야 했다. 지금은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적성 검사를 해야 합니다."
도란이 조수 한 명에게 손짓했다. 조수가 천으로 감싼 구체를 조심스럽게 들고 왔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투명한 공이었는데, 안쪽에서 뿌연 빛이 느릿느릿 돌고 있었다. 도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구체가 마나 적성, 그러니까 이 세계의 에너지를 다루는 잠재력을 측정한다고 했다.
"손을 올려주십시오."
올렸다. 구체가 희미하게 빛나다가... 꺼졌다.
도란의 표정이 굳었다.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도 꺼졌다. 세 번째에는 도란이 구체의 위치를 바꾸고, 내 손을 뒤집어 올려보기까지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빛나다 꺼지고, 빛나다 꺼졌다. 구체 안의 뿌연 빛은 여전히 돌고 있었으니 구체가 고장 난 건 아니었다. 문제는 구체가 아니라 나였다.
"마나 적성이..." 도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역대 최하위입니다."
주위가 술렁거렸다. 방금까지 이마를 찧던 사람들이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경외가 빠진 자리에 의심과 실망이 채워지는 게 보였다. 이런 눈빛은 익숙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빠르고, 실망한 사람의 얼굴에서 호의가 빠지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도란이 반 걸음 물러섰다. 시선이 좌우로 흔들렸다. 이 결과를 왕에게 보고해야 할 텐데, 300년을 기다린 소환의 결과가 이것이라면 쉬운 보고는 아닐 것이다.
그때, 도란의 손등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연두빛에 가까운, 아주 약한 빛이었다. 신전의 촛불 사이에서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봤다. 사람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읽는 건 생존 기술이었고, 빛이라면 더더욱 놓칠 리 없었다.
도란은 자기 손등을 로브 소매 안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뭘 숨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했다.
"일단 왕께서 용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적성 결과는 제가 적절히 보고하겠습니다."
"적절히"가 무슨 뜻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보고하겠다는 건지, 어떻게든 포장하겠다는 건지. 도란의 표정으로는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도란이 나를 이끌어 신전 밖으로 나섰다. 긴 회랑이 펼쳐졌고, 석조 벽의 창문 너머로 밤하늘이 보였다.
달이 두 개였다.
하나는 크고 희었고, 하나는 작고 푸르렀다. 한국의 하늘에는 없는 풍경이었다.
멈칫했다가 다시 걸었다. 달이 두 개라고 서 있으면 안 됐다. 지금 중요한 건 달의 개수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였다.
적성 최하위라는 건 이 사람들이 원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원하지 않는 건 처분되거나 방치된다. 둘 다 좋지 않았다. 필요한 건 이 사람들이 나를 쓸모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도란이 회랑을 걸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왕께 어떻게... 300년 만의 소환인데..." 말이 흐려졌지만 긴장감은 뚜렷했다. 그리고... 도란의 목덜미 피부에서 다시 연두빛이 스쳤다. 희미했지만 분명했다.
두 번째였다. 아까 적성 결과를 "적절히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도, 지금 왕에게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는 이 순간에도, 같은 빛이 나왔다.
규칙이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숨기거나,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때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두 번의 관찰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도란의 등 뒤를 걸으며, 시험 삼아 한마디를 던졌다.
"아, 사실 적성 검사가 좀 이상하게 나온 것 같긴 한데요. 고향에서 저는 꽤 유명한 전사였거든요."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전사는커녕, 내가 마지막으로 싸운 건 중학교 때 골목에서 맞은 거였다.
도란이 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마른 체형을, 빗물에 젖은 검정 점퍼를 훑어보았다. 의심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도 없었다. 고통도 없었다. 경고등처럼 새어나오던 그 연두빛이, 내 몸에서는 흔적도 없었다.
도란은 사실과 다른 말을 하려 할 때 빛이 났다. 두 번이나 같은 패턴이었다.
나는 방금 완전한 거짓말을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가 다른 거지?
회랑 끝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황금 장식이 박힌 이중문이었고, 양쪽에 갑옷을 입은 경비병이 서 있었다. 도란이 문 앞에서 멈추며 로브를 가다듬었다.
"왕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르겠다. 이 빛이 뭔지, 내가 왜 예외인지, 이 세계가 무슨 규칙으로 돌아가는지. 아직 하나도 모르겠다.
지금, 왕 앞에 선다.
방금 한 거짓말이 다음에도 통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