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이 편입된 다음 날, 드라가가 성벽 점검에 나를 데려갔다.
"용사가 방어 회의에 참석한다고 했으니, 성벽이 어떤 상태인지는 봐야지."
드라가의 말투에는 시험이 섞여 있었다. 성벽을 보여주면서 내가 뭘 읽어내는지 보겠다는 뜻이었다.
크롬홀의 성벽은 높지 않았다. 사람 키의 세 배쯤 되는 석벽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고, 군데군데 보수한 자국이 있었다. 방어 회의에서 수리가 필요한 구간이 세 곳이라고 했는데, 직접 보니 석재가 빠져 있거나 모르타르가 갈라진 곳이 눈에 띄었다. 성벽 위를 걸으면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 시장에서 호객하는 소리, 주막 앞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성벽 밖은 달랐다. 남쪽으로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는 들판이었다. 도로가 남쪽으로 곧게 뻗어 있었는데, 어제 피난민과 함께 걸어온 바로 그 도로였다.
남쪽 성벽을 걸었다. 드라가가 앞에서 걸으며 수리 구간을 하나씩 짚었다. 남쪽 성문 좌우의 석벽이 가장 약했고, 서쪽 모퉁이의 기초석이 기울어져 있었다. 부단장이 뒤에서 따라오며 수리 일정을 메모했다. 부단장은 여전히 나를 의심하는 눈이었지만, 드라가가 데려왔으니 반대하지는 않았다.
서쪽 구간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에서 발을 멈췄다. 성벽 아래쪽, 석재가 빠진 구간의 안쪽 면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석재가 빠지면서 안쪽 면이 드러난 것이었다.
원이 세 개 겹쳐 있었다. 원 안에 기하학적 무늬가 있었고, 가장자리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이었다. 오래된 것이었는데, 석재에 깊이 파여 있어서 수백 년은 된 것 같았다. 이끼가 끼어 있었지만 새겨진 선 자체는 정확했다.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마법으로 새긴 것 같았다.
"이건 뭡니까?"
드라가가 돌아봤다. 마법진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겠소. 이 성벽이 세워진 건 300년이 넘었으니, 그때의 것일 수도 있소. 마법진은 내 관할이 아니오."
문자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한 단어가 다른 것보다 크게 새겨져 있었다. 인장처럼 보이는 위치였다.
"노르도."
소리 내어 읽었다. 이 세계의 문자인데, 이름이었다. 마법진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서명과 같은 의미일 것이었다. 누군가가 이 마법진을 만들었고, 자기 이름을 남겼다. 300년이 넘은 성벽에.
"노르도가 누군지 아십니까?"
드라가가 고개를 저었다.
"이 마법진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름까지 알겠소?"
부단장이 한 번 보고 관심 없다는 듯 돌아섰다. 마법진은 군인의 영역이 아니었다. 리나가 다가와서 마법진을 살폈다.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미세하지만 아직 활성 상태입니다. 300년이 넘었는데도."
리나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있었다. 마법진이 수백 년 동안 유지된다는 것 자체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도 마법을 모르니 더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억해두었다. 300년 된 성벽에 새겨진 마법진과 '노르도'라는 이름.
성벽 점검이 끝나고 본부로 돌아오니 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 정찰대를 편성했소." 핀이 말했다. "부하 셋을 남쪽에 보내 순환 정찰을 돌리겠소. 나머지는 성문 경비에 배치했소."
드라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는 직접 나에게."
"알겠소."
핀이 나가면서 나를 봤다. 짧은 눈짓이었다. 고맙다는 뜻인지, 아직 지켜보겠다는 뜻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였다.
성문 앞을 지나갈 때 카르텐이 보였다. 어제와 같은 자리, 성문 옆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핀의 부하들이 자경단 배속을 받아 성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눈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 전체를 읽고 있는 눈이었다. 용사가 무장 무리를 데려와서 자경단에 편입시켰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었다. 카르텐의 눈에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았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다.
핀의 정찰원 셋이 남쪽으로 출발하는 것을 봤다. 가벼운 무장에 속도를 중시한 차림이었다. 핀이 성문 앞에서 정찰원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어제 도로 위에서 만났을 때의 지친 목소리가 아니라, 지시를 내리는 자경단장의 목소리였다. 소속이 생기면 사람이 달라진다.
오후에 핀의 정찰원 한 명이 돌아왔다. 반나절 만이었다. 숨이 가빴다.
"마왕군 정찰대가 남쪽 도로에서 철수했습니다."
드라가가 눈을 좁혔다.
"철수?"
"어제까지 두 곳에서 연기가 올라왔는데, 오늘은 없습니다. 야영 흔적을 확인했는데 급하게 떠난 것 같습니다. 불 자국이 아직 따뜻했고, 발자국의 방향은 서쪽입니다."
서쪽. 척후대가 있는 방향이었다. 핀이 예측한 대로 정찰대가 서쪽 척후대와 합류하고 있었다. 남쪽 도로에서 보급을 차단하던 정찰대가 임무를 마치고 합류한다는 것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뜻이었다.
"합류하는 거요." 핀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정찰이 끝났다는 뜻이오. 남쪽과 서쪽의 정보를 모아서 본대에 보고하는 거요. 그 다음에 본대가 움직이오."
드라가의 손가락이 지도 위에서 멈췄다. 서쪽 30리의 척후대 표시와 남쪽의 정찰대 표시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
"합류하면 30명 가까이 되오." 핀이 말했다. "하지만 합류 부대 자체는 문제가 아니오. 문제는 그 다음이오. 합류 후에 본대에 보고하면, 본대가 움직이오."
핀이 지도 위의 서남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델라를 떠날 때 마왕군 본대가 여기쯤 있었소. 한 달 전이오. 속도로 봐서는 지금쯤 이쯤까지 왔을 거요."
핀의 손가락이 크롬홀에서 사흘 거리 지점에 멈췄다. 드라가가 그 지점을 봤다. 크롬홀에서 가까웠다.
"본대의 전위만 해도 200에서 300이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자경단 40명에 핀의 부하 10명. 합쳐서 50명이었다. 마왕군 전위 200~300명과는 비교가 안 됐다.
"본대가 언제 올 것 같소?"
"정찰대가 합류하고, 보고가 올라가고, 본대가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오. 빠르면 닷새, 느리면 열흘이오."
닷새. 빠르면 닷새 후에 마왕군 전위가 크롬홀 방향으로 온다. 느리면 열흘이지만, 최악의 경우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했다.
드라가가 창밖을 봤다. 성벽 위를 순찰하는 자경단원의 실루엣이 보였다. 성벽 아래 시장에서 호객하는 소리가 올라오고, 대장간에서 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닷새 뒤에도 이 소리가 들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방어 회의를 소집하겠소." 드라가가 말했다. "내일 아침. 전원 참석이오."
나를 봤다.
"용사도."
본부를 나왔다. 해가 기울면서 크롬홀의 지붕 위로 붉은빛이 퍼지고 있었다. 시장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다니며 막대기 검술을 하고 있었다. 용사 놀이였다. "내가 용사다!" 하고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장면이었다.
리나가 내 옆에서 걸었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호 님."
"네."
"아까 성벽에서 마법진을 봤다고 했지요."
"네. 노르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300년이 넘은 마법진이면, 이 성이 세워질 때의 것입니다." 리나가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300년 전은... 마지막 용사가 소환된 시기입니다."
멈칫했다. 300년 전. 대신관 도란이 "300년 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었다.
"마지막 용사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기사단 기록에도 없습니다.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뒤에 용사가 어떻게 됐는지는..." 리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용사가 돌아간 기록은 없습니다."
돌아간 기록이 없다. 왕도에서 대신관 도란이 눈을 피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300년 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때는 오래된 일이라 기록이 유실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나의 말을 듣고 보니, 기록이 없는 것과 기록할 것이 없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돌아가지 못한 건지, 돌아가지 않은 건지."
"모릅니다. 기록 자체가 없으니까." 리나가 나를 봤다. 눈에 복잡한 것이 있었다. "태호 님은 돌아가고 싶습니까?"
돌아가고 싶은가. 어머니가 있었다. 새벽 4시에 보낸 문자. "밥 먹었어." 어머니의 답장. "이 시간에 무슨 밥. 들어와서 자." 그 문자가 마지막이었다. 여기로 오기 전의 마지막 기억. 휴대폰 화면의 밝기, 비에 젖은 오토바이 안장의 차가운 감촉. 아직 선명했다.
"...네."
빛이 나오지 않았다.
리나가 나를 보다가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걸음이 느려졌고, 나란히 걷는 간격이 반 보쯤 좁아져 있었다. 크롬홀의 골목을 나란히 걸으면서, 지붕 위로 별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성벽 너머 남쪽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창밖을 봤다. 남쪽 성벽 너머로 어두워지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저 너머 어딘가에서 마왕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빠르면 닷새.
검 한 자루 못 휘두르는 용사가 전쟁터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아직 답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상대는 사람이었다. 산적, 법관, 카르텐, 드라가, 핀. 사람에게는 진입점이 있었다. 이해관계든, 감정이든, 리스크든. 하지만 군대는 달랐다. 군대는 명령으로 움직이는 집단이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을 읽어야 하는데 마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소문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핀의 정보망이 있고, 리나의 검이 있고, 드라가의 자경단이 있었다. 그리고 내 입이 있었다.
내일 방어 회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