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인데 입만 살았습니다
10화

다음 날 아침, 드라가가 방어 회의에 나를 불렀다.


본부 2층의 같은 방이었다. 탁자 위에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부단장과 정찰대장이 양쪽에 서 있었다. 부단장은 30대 초반의 건장한 남자였고, 정찰대장은 마른 체형에 눈이 날카로운 남자였다. 둘 다 나를 보는 눈에 의심이 있었다. 용사라고 들었는데 검도 갑옷도 없으니 당연했다.


리나가 내 옆에 섰다. 검을 찬 채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이 방에서 유일하게 긴장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드라가가 지도의 서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찰대가 서쪽 30리 지점에서 마왕군 척후대의 흔적을 발견했소. 발자국과 야영 흔적. 인원은 20명 내외로 추정되오."


30리면 하루 거리였다. 당장 위협은 아니지만, 코앞까지 와 있었다.


"본대는?" 내가 물었다.


정찰대장이 대답했다.


"본대의 위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척후대가 정찰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으로 봐서, 본대가 이동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 급한 문제가 있소." 드라가가 지도의 남쪽을 가리켰다. "남쪽에서 피난민이 올라오고 있소. 크롬홀 남쪽 이틀 거리에 있던 마을 두 곳이 비었다는 보고가 왔소. 마왕군이 아직 그쪽까지 내려간 건 아닌데, 소문만으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요."


피난민. 마왕군의 소문만으로 마을이 비는 것이다.


"피난민이 몇이나 됩니까?"


"수레 열두 대, 사람은 50명에서 70명 사이요. 문제는." 드라가가 뜸을 들였다. "도로 위에 무장한 무리가 있소. 피난민 행렬을 가로막고 있다는 보고가 왔소."


"도적입니까?"


"확실하지 않소. 정찰 보고로는 10명에서 15명. 무장은 가볍지만, 전직 자경단이나 용병 출신이 섞여 있다는 이야기도 있소."


부단장이 입을 열었다.


"자경단을 보내면 됩니다."


"인원이 부족하오." 드라가가 고개를 저었다. "서쪽 경계를 빼면 마왕군 척후대에 대응할 수가 없소. 남쪽까지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소."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부단장과 정찰대장이 서로를 봤다. 드라가의 시선이 나에게로 왔다.


"용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시험이었다. 어제 소문을 팔겠다고 했으니, 그 소문의 값어치를 보여달라는 뜻이었다.


전투력이 없다는 건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투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것이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면, 둘 다 절반만 하는 것보다 하나를 완전히 하는 게 낫습니다."


부단장의 눈이 달라졌다. 드라가도 나를 봤다.


"서쪽 경계는 자경단이 전담하고, 남쪽은 별도로 처리하는 겁니다. 그리고 도적이라면 목적이 있을 겁니다. 약탈인지, 통행세 징수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에 따라 대응이 달라집니다."


"좋은 분석이오." 드라가가 팔짱을 풀었다. "하지만 남쪽을 누가 처리하겠소? 병력을 빼면 서쪽이 비오."


"그러면 제가 가보겠습니다."


부단장이 나를 봤다. 검도 없는 사람이 뭘 하겠다는 거냐는 눈이었다.


"리나 기사와 둘이 가겠습니다. 무장 무리의 정체와 목적을 파악하고, 피난민의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드라가가 3초쯤 나를 봤다.


"싸울 생각이오?"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대화로 해결될 수 있으면 대화로 하고, 안 되면 리나 기사가 있습니다."


리나가 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하지 않았다. 기사로서 피난민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였을 것이다.


드라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소. 가서 확인하고 돌아오시오. 죽일 필요는 없소. 피난민이 올라올 수 있게만 하면 되오."


회의가 끝났다. 부단장이 먼저 나가면서 문 앞에서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나를 보는 눈이었다. 아직 믿지 않고 있었다. 정찰대장은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이쪽은 판단을 보류하고 있는 눈이었다.


드라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밖을 봤다.


"태호."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네."


"피난민은 데려오시오. 도적은... 판단은 맡기겠소."


무장한 무리가 진짜 도적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드라가도 정보가 부족했다.


복도를 걸으며 리나가 말했다.


"전투가 필요하면 제가 합니다. 당신은 뒤에 있으세요."


"네."


솔직한 대답이었다. 리나가 약간 놀란 것 같았다. 거짓 겸손이 아니라 진짜 인정하는 톤이어서일 것이다.


"뒤에 있되, 입은 앞에 있을 겁니다."


리나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란델에서부터 같이 싸워왔으니, 역할 분담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보급을 챙기고 성문을 나섰다. 성문 옆의 그늘에서 카르텐이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우리가 나오는 걸 보고 눈이 움직였지만, 따라오지는 않았다. 성 안에서는 자경단의 보호가 있었고, 카르텐은 그 선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성 밖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다른 이야기였다.


남쪽 도로는 크롬홀 성벽에서 곧장 뻗어 있었다. 도로 양쪽에 경작지가 있었는데, 크롬홀에서 멀어질수록 밭이 줄어들고 풀이 높아졌다. 인적이 드물어졌다. 크롬홀을 지나면 다음 마을까지 거리가 멀다는 뜻이었다.


도로 위로 상인 수레 하나가 반대편에서 왔다. 크롬홀 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상인이 리나의 갑옷을 보고 말을 걸었다.


"남쪽에서 오시는 겁니까?"


"아뇨, 남쪽으로 갑니다."


상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남쪽은 좀 어수선합니다. 피난민이 올라오고 있고, 도로에 무장한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상인이 수레를 몰고 지나갔다. 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다.


두 시간쯤 걸었을 때 리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태호 님."


"네."


"아까 회의에서, 대화로 해결하겠다고 했잖아요."


"네."


"도적한테 대화가 통합니까?"


"통할 수도 있고 안 통할 수도 있습니다. 도적도 사람이니까요."


리나가 말 위에서 전방을 보며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처음이었다. 리나가 먼저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 것이.


"기사의 검은 마지막 수단이다. 검을 뽑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걸 먼저 해라."


"좋은 말입니다."


"기사단 교관이 할 말은 아니었지요." 리나가 짧게 웃었다. "기사단에서는 검을 먼저 뽑으라고 가르칩니다. 아버지는 좀 달랐어요."


"그래서 리나 기사도 검을 마지막에 뽑습니까?"


리나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검을 먼저 뽑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따르고 싶었지만, 현실에서는 검이 먼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리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버지는 검을 마지막에 뽑는 사람이었는데, 결국 검으로도 지키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더 묻지 않았다. 란델에서도 리나는 아버지에 대해 "비슷한 일을 당했습니다"라고만 말했었다. 언약의 해석이 뒤틀려서 맹세가 파기됐다는 것. 기사단 교관이었던 아버지에게 맹세 파기가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리나가 왕실의 맹세를 목숨처럼 지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도로 양쪽의 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먼 곳에서 새가 울었다. 오후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그림자가 길어졌다.


"아버지의 검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까?"


"균형이 좋아서요."


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뒤에 한마디가 더 붙었다.


"그리고 이 검을 들고 있으면, 아버지가 지키려던 것을 대신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리나가 전방을 보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건 좀 감상적인 이유군요."


"네. 저도 압니다."


리나가 작게 웃었다. 처음 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자조적이지 않고, 방어적이지도 않은, 그냥 편안한 웃음이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검을 들고, 아버지가 못 한 것을 하려 하고 있었다.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검을 안고 자는 이유는 이해가 됐다.


해가 더 기울면서 도로 위에 바퀴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레가 지나간 흔적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대였고, 자국이 깊었다. 짐을 잔뜩 실은 수레들이었다.


"피난민의 흔적입니다."


리나가 말에서 내려 바퀴 자국을 확인했다.


"이틀 이내의 흔적입니다. 멀지 않습니다."


더 가니까 도로 옆에 야영 흔적이 있었다. 불 피운 자국, 보따리를 내려놓은 자리, 아이의 신발 자국. 급하게 떠나온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짐을 풀었다가 다시 싸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깨진 그릇, 찢어진 천. 버리고 간 것이었다. 소중한 것만 추려서 다시 떠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바퀴 자국이 멈추는 지점이 보였다. 수레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멈춰 있었다. 수레 사이에 사람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와 아이가 많았다.


수레 앞쪽, 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10명 남짓이었다. 칼과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장비가 제각각이었다. 정규군이 아니라 급하게 모인 무리 같았다. 선두에 서 있는 남자가 피난민 대표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양쪽 다 목소리가 높았다. 피난민 쪽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리나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도적입니까?"


나는 무리를 봤다. 도적치고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약탈하려면 이미 했을 것이다. 피난민의 수레에는 짐이 잔뜩 실려 있었고, 무장한 쪽이 숫자도 많았다. 힘으로 빼앗으려면 진작 했을 텐데, 수레를 막고 대표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뭔가를 협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무장한 무리의 뒤쪽에 수레가 세 대 더 있었다. 그쪽에도 여자와 아이가 있었다. 무장 무리의 가족이었다.


도적이 가족을 데리고 다니지는 않는다.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저 사람들, 도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