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배달 사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강태호는 헬멧 안으로 스며드는 빗물을 닦으며 핸들을 잡았다. 방수라고 해서 산 헬멧인데 돈값을 못 한다. 배달 장비에는 돈을 아끼면 안 된다는 걸 4년 차에야 깨달았지만, 깨달은 것과 지갑 사정은 별개의 문제였다.
밤 열한 시 사십칠 분. 마지막 배달이다.
핸드폰이 울렸다.
"태호야, 이번 달 이자가 또..."
어머니의 목소리는 언제나 미안함과 걱정이 반반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빚. 2억 3천. 배달을 뛰기 시작한 지 4년, 갚은 건 4천만 원 조금 넘는다. 이 속도면 20년.
"괜찮아요. 이번 달에 넣을게요."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안 하면 어머니가 잠을 못 잔다. 괜찮다는 말은 태호가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었다.
통화를 끊고 배달 앱을 확인했다. 치킨 1마리. 목적지까지 2.3킬로. 예상 도착 7분.
시동을 걸었다.
비가 더 세졌다. 와이퍼가 없는 오토바이의 단점이 이럴 때 나온다. 시야가 흐려지고 도로 위의 불빛들이 번졌다. 4년간 몸에 익힌 감각이 자동으로 도로를 읽었다. 신호 한 번 건너뛰면 2분 단축. 뒷골목 좌회전하면 1분 더.
교차로에 진입하는 순간, 핸드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배달 앱의 알림이 아니었다. 낮고 무거운 공명. 뼛속까지 울리는 진동.
뭐지?
핸들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온몸이 굳었다. 발밑에서 빛이 올라왔다. 아스팔트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의 바닥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핸들을 쥔 손이 허공을 잡았다. 오토바이가 사라졌다. 아니, 태호의 몸이 사라지고 있었다. 발끝부터 녹아내리듯 감각이 없어지고, 빗소리가 멀어졌다. 귀가 먹먹해지면서 심장 박동만 커졌다. 위장이 엘리베이터 급하강 때처럼 치밀어 올랐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치킨이 식겠다, 였다.
차가운 돌바닥이었다.
뒤통수가 욱신거렸다. 태호는 눈을 떴다.
바로 옆에 배달 가방이 엎어져 있었다. 검정색 보온 가방. 지퍼가 열려서 치킨 박스가 반쯤 튀어나와 있다. 기름 냄새가 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 헬멧이 데굴데굴 구르다 돌기둥에 부딪혀 멈춰 있었다. 오토바이는 없었다. 라이더는 왔는데 바이크는 안 온 거다.
태호는 반사적으로 치킨 박스를 세웠다. 기울어지면 양념이 쏠린다. 4년간 몸에 밴 습관은 이세계 신전 바닥에서도 작동했다.
천장이 보였다. 너무 높았다. 돌기둥이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고, 기둥 표면에 가늘고 날카로운 문자가 빼곡했다. 읽을 수 없는 글자인데, 글자 하나하나가 희미하게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뭐야 이건. 영화 세트장?
바닥은 검은 대리석이었다. 방사형 문양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 있고, 태호가 누워 있는 곳이 정확히 그 중심이었다. 왜 하필 한가운데지.
돌기둥 끝에 거대한 수정이 떠 있었다. 흰빛을 뿜으며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공기가 서늘하고 묵직했다.
"용사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호가 고개를 돌렸다. 흰 옷을 입은 노인이 양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 뒤로 수십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전부 흰옷이었다. 옷깃에서 소매까지 가는 은실로 문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기둥의 문자와 같은 모양이었다.
무릎 꿇은 사제들은 양손을 가슴 위에 포개고, 입술을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하고 있는데 소리가 안 나는 건지, 아니면 소리를 내면 안 되는 건지.
사제? 수도승? 뭐라 부르든, 이건 —
"드디어 오셨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격에 젖은 눈이었다. 그 뒤에 무릎 꿇은 사람들 중 몇 명은 울고 있었다.
태호는 상반신을 일으키다가, 옆의 치킨 박스를 봤다. 그리고 수십 명의 사제를 봤다. 치킨. 사제. 돌기둥. 거대한 수정.
"여기가 어디예요?"
"이곳은 서약의 신전입니다. 아르케나 대륙의 중심, 서약의 탑 아래 위치한..."
"아, 잠깐만요."
태호가 주머니를 뒤졌다. 핸드폰이 있었다. 화면이 깨져 있었고, 전원이 안 들어왔다.
"배달 앱이 안 되는데. 혹시 와이파이 되는 곳 있어요?"
신전이 조용해졌다.
노인의 벌린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 와이파이?"
"인터넷이요. 아, 충전기라도. C타입 있으세요?"
앞줄의 젊은 사제가 바닥의 치킨 박스를 내려다봤다. 눈이 날카로운 편이었다. 기름이 검은 대리석 위로 번지고 있었다. 사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신성한 소환진 위에 튀김 기름이라니.
노인 뒤에 무릎 꿇은 다른 사제가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뭐라는 거야?"
"몰라. 이세계 주술 아닌가?"
"아니, 우리 말 하고 있잖아."
태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들린다. 한국어가 아닌데 한국어처럼 들리고, 태호의 말도 이 사람들에게 통하고 있었다.
"용사여."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대신관 카를로스입니다. 300년 만에 서약의 탑이 당신을 부른 것입니다."
"부르다니, 뭘요?"
"세계를 위협하는 마왕을 물리칠 용사를."
마왕.
태호는 대신관을 바라봤다. 진지했다. 뒤의 사제들도 진지했다. 울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진짜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3년 동안. 대륙의 절반이 짓밟히는 동안.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가 왔는데 — 그게 서울 금천구의 배달 라이더였다. 치킨 한 마리와 함께.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돌바닥도 진짜였다. 차가운 공기도 진짜였다.
이건 꿈이 아니다.
"적성 검사를 진행하겠습니다."
대신관이 손짓하자 사제 두 명이 작은 수정구를 들고 왔다. 주먹만 한 크기의 반투명한 구슬.
"손을 올려놓으시면 됩니다."
태호는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일단 살아남는 법이다. 고객이 뭘 시키든 일단 네, 하고 나서 생각한다. 4년간 그렇게 살아왔다.
수정구가 빛났다.
아주 희미하게.
촛불보다 약한 빛이 한 번 깜빡이더니 꺼졌다.
신전이 침묵에 잠겼다.
대신관이 수정구를 들어 확인했다. 구슬 안에 작은 숫자가 떠올랐다.
"7."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일곱이라고?"
"역대 최저가 43이었는데..."
"아이보다 낮잖아."
수군거림이 퍼졌다. 태호는 숫자의 의미를 몰랐지만, 분위기는 읽을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1시간 늦게 도착한 배달원을 보는 고객의 눈. 기대했는데 실망한 사람의 눈. 그 시선을 수십 명에게 동시에 받는 건 처음이었다.
대신관이 수정구를 내려놓았다. 양팔을 벌려 용사를 맞이하던 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까의 경건함은 사라지고, 곤란함만 남은 얼굴이었다.
"대신관님."
아까 치킨 기름에 눈썹을 찌푸렸던 젊은 사제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제들보다 어려 보였다. 스물대여섯, 또래쯤.
"이 정도 적성이라면... 소환 오류가 아니겠습니까? 탑이 잘못 부른 것일 수..."
사제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사제의 어깨에서 빛이 스며 나왔다. 희미한 빛이었지만 분명했다. 빛은 몸 전체로 퍼지더니 손끝에서 흩어졌다. 사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를 악물고, 잠깐 비틀거렸다. 동시에 기둥의 파란 문자 몇 개가 한 박자 밝게 깜빡였다.
"괜찮나, 도란."
옆의 나이 든 사제가 팔을 잡아줬다.
"... 네. 실언이었습니다."
도란이라 불린 젊은 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한마디 했을 뿐인데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태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사제가 뭘 잘못한 거지? '탑이 잘못 부른 것일 수'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몸에서 빛이 나고 아파했다. 주위의 다른 사제들은 동정이 아니라 눈치를 보는 표정이었다. 본인도 그런 적이 있다는 얼굴들. 아까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도 이것 때문인가.
이 세계에서 말은 공짜가 아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확실했다.
"용사를 객실로 안내하겠다."
대신관이 말했다. 태호를 바라보는 눈에서 아까의 기대가 사라져 있었다.
안내. 이 맥락에서 그 말은 격리에 가까웠다.
적성 7이라는 숫자가 나온 순간, 이 사람들에게 태호는 용사가 아니라 사고였다. 처리해야 할 문제. 돌려보내든, 내보내든, 어딘가에 넣어두든. 낯선 세계에서 아무 연줄도 없이 버려진다.
그건 안 된다.
태호의 입이 열렸다.
생각보다 혀가 먼저 움직이는 건, 4년간 고객 불만에 대응하고 사장님한테 사정하고 빚쟁이한테 시간을 벌어온 이 혀의 특기였다.
"잠깐만요."
사제들이 멈췄다.
"적성이 낮다고 하셨죠?"
대신관이 경계하는 눈으로 돌아봤다.
"그렇습니다."
"제 고향에서는요."
태호는 잠깐 숨을 쉬었다. 다음에 할 말은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서울 금천구에 마나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이 순간 진실을 말하면 끝이다.
"적성이 낮은 건, 잠재력이 너무 커서 수정구가 측정을 못 하는 겁니다."
완전한 거짓말.
아까 도란이 한마디에 창백해진 게 떠올랐다. 태호도 몸이 빛나거나, 쓰러지거나, 무슨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도 없었다. 통증도 없었다. 기둥의 문자도 깜빡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리고 — 신전이 조용해졌다.
아까와는 다른 조용함이었다. 아까는 경멸의 침묵이었다. 지금은 생각하는 침묵이었다.
"... 측정을 못 한다?"
대신관이 되물었다.
"예. 수정구가 잡아내지 못할 만큼 큰 힘은, 오히려 0에 가깝게 나옵니다. 그릇이 작으니까요."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제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경멸이 걷히고, 그 자리에 불확실함이 들어섰다.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는 얼굴들.
도란이 확실하지 않은 말 한마디에 대가를 치른 걸, 이 사람들은 봤다. 그런데 태호가 두 마디나 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니까 — 이 사람들의 논리로는, 태호의 말이 거짓이 아닐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 내일, 왕을 알현시키겠습니다."
대신관이 말했다. 아까의 격리 분위기와는 달랐다. 적성 7에 대한 결론을 유보한 눈이었다. 아직 못 미더웠지만,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눈.
사제들에 이끌려 신전을 나왔다.
돌복도를 걸었다. 도란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나이 든 사제가 뒤에서 따라왔다. 도란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 태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걸음걸이였다.
객실이라고 안내받은 곳은 작은 석실이었다. 돌침대 하나, 작은 탁자, 물이 담긴 토기 하나. 호텔은 아니었지만, 감옥도 아니었다. 그 중간쯤.
도란이 문 앞에서 멈칫했다.
"배달 가방은 제가 가져다 놓겠습니다."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태호는 그 멈칫함을 놓치지 않았다. 아까 소환진 위의 기름에 눈살을 찌푸리던 사제가, 지금은 그 가방을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한다. 호기심인지 의심인지, 아까 거짓말에 대가가 없었던 게 이 사제의 머릿속에서도 돌아가고 있었다.
문이 닫혔다.
태호는 석실의 좁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봤다.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하나는 크고 푸르스름했고, 하나는 작고 붉었다. 서울의 달은 하나였다. 그마저도 빌딩에 가려서 잘 안 보였는데.
서울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전화할 수도 없었다. 이 시간이면 잠은 잤을까. '괜찮아요'라고 했으니 잠은 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거짓말이 그래도 쓸모가 있었다.
태호는 창틀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두려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이 세계가 뭔지도 모르고, 마왕이 뭔지도 모르고, 돌아가는 방법은 더더욱 모른다.
하지만 아까, 거짓말에 아무 대가도 없었다.
이 세계에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내일, 왕 앞에 선다.
배달은 실패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