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의 손이 검 손잡이로 갔다.
"내려요."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라는 뜻인지, 고개를 내리라는 뜻인지. 아마 둘 다였다.
산적은 대여섯 명이었다. 가운데 선 남자가 두목으로 보였는데, 덩치가 크고 턱에 흉터가 있었다. 도끼를 한 손에 느슨하게 들고 있었고, 나머지는 칼이나 곤봉을 들고 뒤에 서 있었다. 나무 바리케이드 뒤에 몸을 반쯤 숨긴 놈도 두 명 있었다.
리나가 검을 잡은 채 마차 앞으로 나섰다. 산적들 중 두 명의 시선이 리나의 검으로 갔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피 냄새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통행세라."
내가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리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돌아봤지만, 가만히 있으면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얼마입니까?"
두목이 웃었다. 이빨이 하나 빠져 있었다.
"왕실 마차니까, 금화 20닢. 그리고 수레에 실린 보급품의 절반."
보급품의 절반을 요구하는 건 어디서든 강도짓이었다. 두목의 눈이 마차의 문양에 머물렀다가 내 옷차림으로, 리나의 검으로, 수레의 짐으로 돌아다녔다. 값어치를 재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두목이 "용사님"이라고 했을 때, 뒤에 있는 산적 두 명이 반 걸음 물러섰다. 용사라는 말에 위축되면서도 통행세를 요구하는 건 절박하거나, 이 용사가 약하다는 걸 눈치챘거나. 내 차림을 보면 후자 쪽이겠지.
"거절합니다."
리나가 앞에서 말했다.
"왕실의 호위 임무를 방해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합니다. 길을 비키십시오."
두목이 입술을 핥았고 뒤의 산적들이 무기를 고쳐 잡았다. 리나가 강하지만 방금 네 마리와 싸운 직후였다. 상대가 여섯이고, 불확실성을 안고 싸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잠깐."
나는 리나 옆으로 나섰다. 리나가 눈으로 제지했지만 무시했다.
"두목, 하나만 물어봅시다. 방금 숲에서 나온 것들 봤습니까?"
두목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봤거나, 소리를 들었거나.
"저 기사가 네 마리를 10초 만에 잡았습니다. 혼자서."
산적 두 명이 리나의 검을 다시 봤다.
"그건 괴물이고 우리는 사람이야." 두목이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확신이 빠져 있었다.
"맞습니다. 사람이지요.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하려는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섰다.
"당신들은 지금 왕실 마차를 막고 있고, 이 기사는 왕실 호위 임무 중입니다. 길을 막으면 반역이라고 했죠? 이 기사가 당신들을 베면, 그건 반역자 처리입니다. 법적으로 정당하고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어요."
두목의 이가 빠진 쪽 볼이 살짝 당겨졌다.
"그런데."
톤을 바꿨다.
"저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들도 먹고살려고 이러는 거잖습니까."
"용사가 먹고사는 걸 걱정해주나."
"저도 먹고사는 문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안은 이겁니다. 길을 비켜주면, 크롬홀에 도착했을 때 이 마차가 왕실 소속이라는 걸 이용해서 당신들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왕실 마차를 통과시켜준 산적이라면, 반역자가 아니라 협조자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내 손등에서는 아무 빛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목소리를 낮췄다.
"용사가 크롬홀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 도로에 왕실 병력이 배치됩니다. 그때 여기서 통행세를 걷고 있으면 다음 토벌 대상이 되는 겁니다."
두목의 표정이 바뀌면서 도끼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뒤의 산적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협조자로 기록된다고?"
"왕실 직인이 찍힌 마차를 무사히 통과시켜준 기록이 남습니다. 나쁜 거래가 아닙니다."
길가에 앉아 있던 산적 하나가 곤봉을 내려놓으며 옆 사람을 팔꿈치로 쿡 쳤다. 입술의 형태로 짐작하면 "빛 안 났다"는 말이었다. 두목이 뒤를 돌아봤다. 산적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으쓱했다.
"...좋다."
두목이 도끼를 내렸다.
"비켜라."
바리케이드가 옆으로 밀렸다. 마차가 지나갈 때 두목이 나를 불렀다.
"용사."
"네."
"약속이다."
"약속입니다."
두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길 옆으로 물러섰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면서 심호흡을 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까 괴물이 나왔을 때와 비슷한 떨림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까는 두려움이었고, 지금은 안도였다.
리나가 마차 옆에서 걷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였다.
"방금, 전부 거짓말이었죠?"
"빛이 안 나왔습니다."
"빛이 안 나왔으니 거짓말이 아닌 거겠죠."
하지만 눈은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경멸이라기보다는 확인하려는 쪽에 가까웠다.
"리나 기사."
"네."
"전투는 당신이 맡아주시고, 말은 제가 하겠습니다."
리나가 잠시 멈칫했다. 대답 없이 다시 걸었다. 거부하지 않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을 때, 도로 옆에 작은 마을이 보였다. 마을이라고 하기엔 건물이 열 채 남짓이었다. 간판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방패와 검이 교차된 그림 밑에 망토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리나가 마차를 세웠다.
"물을 보충하고 가겠습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내 차림을 내려다봤다. 검정 점퍼, 카고바지, 배달용 운동화. 이틀째 같은 옷이었고, 빗물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 차림으로 여정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장비점 문을 열자 나무 냄새와 기름 냄새가 섞여 나왔다. 카운터 뒤에 50대쯤 되어 보이는 덩치 좋은 남자가 앉아 가죽을 꿰매고 있었다.
"뭘 찾으시오?"
올려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여행용 장비요. 망토, 부츠, 장갑, 가죽 조끼."
"벽에 걸려 있소. 가격은 옆에 붙어 있고."
가격표를 봤다. 합치면 39. 주머니에서 나온 건 한국 동전 세 개뿐이었다. 이 세계의 화폐는 하나도 없었다.
"사겠소, 말겠소?"
주인이 고개를 들고 내 차림을 훑었다. 돈이 없는 손님이라는 판단이 눈에 서는 게 보였다.
"주인장, 이 마을에 용사가 지나갔다는 소문 들어보셨습니까?"
"300년 만의 용사가 소환됐다는 소문은 들었소. 왕도에서 떠도는 얘기지."
"제가 그 용사입니다."
침묵. 주인의 눈이 좁아지며 내 차림을 다시 봤다.
"증거가 있소?"
"밖에 왕실 문양이 찍힌 마차가 서 있습니다."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갔다. 마차를 확인하고 돌아온 뒤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진짜 용사시오?"
"빛이 나오면 거짓말이겠지요."
손등을 펴서 보여줬다. 주인이 5초쯤 응시했다.
"...그래서, 용사님이 우리 가게에 왜 오신 거요?"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돈이 없습니다."
주인의 표정이 '역시 그런 거구만'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하나 생각해보십시오. 300년 만의 용사가 이 가게에서 장비를 맞췄다는 사실이 퍼지면, 이 가게에 어떤 일이 생길까요?"
주인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용사의 장비를 만든 가게. 소문이 크롬홀까지 퍼지고 왕도까지 올라가면, 이 도로를 지나는 여행자들이 간판을 보러 올 겁니다. 광고비 없이 이 정도 홍보를 얻을 기회가 자주 오진 않습니다."
내 손등에서는 빛이 나오지 않았다.
"소문이 퍼진다고 장사가 되는 건 아니오."
아직 안 넘어왔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장비값은 외상으로 하되, 크롬홀에서 이 가게 이름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크롬홀은 자경단이 있는 방어형 마을이라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왕실 용사가 장비를 맞춘 가게'라고 한마디만 하면, 자경단에서 발주가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인의 시선이 다시 내 손등으로 갔다. 빛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가게 이름은 '겔투스 장비점'이오."
나는 웃지 않았다. 거래가 성사된 순간에 웃으면 상대가 속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겔투스 장비점. 기억하겠습니다."
15분 뒤, 나는 가죽 조끼에 여행용 망토를 걸치고 새 부츠를 신고 가게를 나왔다. 겔투스가 직접 사이즈를 맞춰줬는데, 내 체형이 마른 편이라 조끼 끈을 두 번이나 조여야 했다.
마차 옆에서 리나가 물통에 물을 채우다가, 내 차림을 보고 손이 멈췄다.
"...그 장비는요?"
"겔투스 장비점에서 맞췄습니다."
"돈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훔친 겁니까?"
"아뇨. 정당한 거래입니다. 말로 했습니다."
리나가 3초쯤 나를 보다가, 물통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당신, 원래 사기꾼이었어요?"
경멸이 빠진 자리에, 어이없음 비슷한 것이 있었다. 리나의 눈이 피했다.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동작이 보였다.
"사기꾼이 아니라 협상가입니다."
"차이가 뭡니까?"
"사기꾼은 상대를 속이고, 협상가는 상대가 이득이라고 느끼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같은 거 아닙니까?"
대답 대신 웃었다. 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마차에 물통을 실었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새 망토의 무게가 어깨를 눌렀다. 배달용 바람막이와는 질감이 완전히 달랐다. 더 무겁고, 더 따뜻했다.
해가 지고 야영을 했다. 리나가 주변을 경계하고 나는 마차 옆에 앉아 있었다.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이 광경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이튿날 오후, 도로 끝에 성벽이 나타났다. 크롬홀이 아니었다. 리나가 말했다.
"란델이라는 마을입니다. 크롬홀까지 하루 반 남짓 거리에 있는 장터 마을이에요. 물자를 보충하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마을 입구에 위병 둘이 서 있었다. 왕실 마차의 문양을 보더니 자세를 고쳐 잡았고, 리나가 호위 임무임을 밝히자 바로 통과시켜줬다.
란델은 겔투스의 마을보다 훨씬 컸다. 중앙에 넓은 장터가 있었고, 양쪽으로 상점과 주막이 늘어서 있었다. 수레를 끄는 상인과 짐을 지고 가는 농부,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장터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20명쯤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앞에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뒤에 비단 옷을 입은 남자가 서류 뭉치를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옆에 호위로 보이는 무장한 남자가 둘 서 있었다.
탁자 앞에 농부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마른 남자였는데, 등이 굽고 손이 갈라져 있었다. 밭일을 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맹세했잖습니까, 나리. 수확의 반을 내겠다고 했지, 땅까지 내놓겠다고는 —"
"맹세의 해석은 법관의 권한이다."
탁자 뒤의 남자가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단조로웠다. 지루하다는 듯이.
"'수확의 반'에는 그 수확을 내는 땅의 사용권이 포함된다. 언약 체계에서 부분은 전체를 함축한다. 이건 해석이 아니라 사실이야."
농부의 얼굴이 하얘졌다. 주변의 사람들이 고개를 더 숙였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리나의 걸음이 느려졌다. 탁자 쪽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차가움이 아니라 뭔가를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리나 기사, 저 사람이 뭡니까?"
"언약 법관입니다."
목소리가 단단했다. 검 손잡이 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모호한 언약의 해석권을 가진 귀족입니다. 저 해석이 통하면 농부는 땅을 잃습니다."
나는 탁자 앞의 농부를 다시 봤다. 갈라진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법관이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는 순간, 농부가 소매를 잡았다. 법관의 호위가 농부의 손을 쳤다.
리나의 손이 검으로 갔다. 내가 리나의 팔을 잡았다. 리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봤다.
"지금은 안 됩니다."
"저 사람이 —"
"압니다. 그런데 지금 뛰어들면 반역입니다. 법관은 귀족이에요."
리나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멈춰 섰다.
법관이 도장을 찍었다. 농부가 고개를 떨구었다. 주변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산적은 말로 넘겼다. 겔투스도 말로 넘겼다. 이건 달랐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 말의 규칙 자체를 쥐고 있는 상대였다.
크롬홀까지 하루 반. 하지만 이 마을에서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