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인데 입만 살았습니다
32화

노르도가 차를 건네고, 이야기를 이었다.


"탑이 순환을 만드는 방식이 있소."


목소리가 차분했다. 아까의 무거움이 가시고, 학자의 톤이 나오고 있었다. 손이 허공에 도식을 그리듯 움직이기도 했다.


"300년마다 마나의 균형이 무너지오.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오. 탑이 의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편향시키오. 한쪽으로 몰린 마나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탑이 두 가지를 하오. 하나는 마왕을 지정하는 것이고, 하나는 용사를 부르는 것이오."


마왕을 지정한다. 이 말이 유적 비문과 맞아떨어졌다. '탑이 왕을 만들고, 탑이 적을 만든다.' 마왕은 자발적으로 마왕이 된 것이 아니라, 지정된 것이다.


"마왕은... 선택이 아닌 겁니까?"


"아니오. 탑이 골라서 마나를 부어넣는 것이오. 마나에 적합한 그릇을 탑이 찾고, 그 사람에게 강제로 마왕의 힘을 심는 것이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 마왕군 병사가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마왕님은 원래 이러지 않았다. 학자이셨는데." 강 검문소에서 들은 그 한마디가 지금 노르도의 설명과 겹쳤다. 아자렐은 학자였다. 3년 전에 탑이 골라서 마왕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마왕도 그렇습니까?"


"아자렐이라는 이름이오?"


노르도가 물었다. 이 사람은 현재 마왕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네. 벨카가 그 이름을 말했습니다."


"아자렐." 노르도가 이름을 되뇌었다. 눈이 멀리를 보는 듯했다. 움막 벽 너머, 남쪽 하늘의 마왕성을 보는 듯한. "그 사람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소."


"논문이요?"


"마왕이 되기 전에... 학자로서 쓴 논문이오. '언약 체계의 구조적 모순과 탑의 역할'이라는 제목이었소. 탑이 의도적으로 마나 불균형을 유발하여 순환을 만든다는 결론을 담고 있었소."


노르도가 선반에서 가죽 묶음을 꺼냈다. 책이 아니라 종이를 묶은 것이었는데, 낡은 종이에 이 세계의 문자로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읽을 수는 있었지만, 학술적인 내용이라 속도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논문입니까?"


"사본이오. 원본은 왕도의 기록관에 있을 것이오. 남아 있다면."


노르도가 논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자렐이 탑의 진실을 연구하고 있었소. 학자로서. 그리고 탑이 그 사람을 마왕으로 골랐소."


우연이 아니었다. 탑의 진실을 파고드는 학자를, 탑이 마왕으로 만들었다.


"잠식이라는 게 있소."


노르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왕으로 지정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탑의 마나에 잠식되오. 자아가 흐려지고, 탑의 의지에 가까워지오. 완전히 잠식되면 그 사람은 탑의 도구가 되오. 이전의 마왕들도 그랬소.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결국 잠식되어 전쟁을 일으키고, 용사에게 쓰러지고, 순환이 완성되오."


300년의 반복. 탑이 마왕을 만들고, 용사를 부르고, 싸우게 하고, 끝나면 다시 시작하는 것. 그 순환의 바퀴 위에 지금 아자렐이 있고, 내가 있었다.


"벨카가... 아자렐을 구하고 싶어한다고 했습니다."


"그럴 것이오. 잠식이 완료되기 전에 멈출 수 있다면 구할 수 있소. 하지만 잠식을 멈추려면 탑 자체를 멈춰야 하오."


탑을 멈춘다. 300년 동안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노르도가 나를 보았다.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무언가를 평가하고 있었다. 마나를 읽고 있었다.


"젊은이에게 물어볼 것이 하나 있소."


"네."


"거짓말을 할 때... 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소?"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이 노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해도 빛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마나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직접 묻지 않았다. 지금 묻는 것은 확인이 아니라 이해를 위해서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빛도 안 나고, 마나가 소모되는 느낌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소?"


"이 세계에 온 이후로는 항상."


노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라는 듯이.


"이세계에서 소환된 존재는 아르케나의 마나장과 불완전하게 연결되오. 마나를 쓸 수는 있지만, 언약 체계의 자동 감지가 작동하지 않소. 거짓말을 해도 마나가 소모되지 않고, 빛이 나오지 않는 것은 체질이오. 이 세계의 결함이 아니라 소환 자체의 구조적 특성이오."


체질. [언약 밖의 혀]가 나만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소환된 존재라면 누구나 가지는 특성이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용사들도 같았을 것이다.


"이전 용사들도... 이랬습니까?"


"기록상으로는 그렇소. 하지만 300년 전의 기록은 탑에 의해 삭제되었소. 아르케나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오. 소환된 용사가 언약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보존한 기록이 유일하오."


노르도가 선반에서 세 권 중 가장 낡은 책 한 권을 꺼냈다. 가죽 표지가 갈라져 있고 등이 실로 꿰매져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펼치자 빼곡한 글씨와 도식이 있었다. 마나 흐름의 도식, 소환진의 구조, 그 옆에 빼곡한 메모.


"이것이... 내가 50년간 지켜온 것이오."


기록. 탑이 삭제한 기록을,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도망치면서도 이것만은 가져왔다는 것이다. 동료를 버렸지만, 기록은 버리지 않았다.


"왜... 저에게 이걸 보여주시는 겁니까?"


물어야 했다. 50년간 숨겨온 것을 이제 와서 보여주는 이유를. 감자를 캤다고, 밭일을 도왔다고 보여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르도가 나를 봤다. 오랫동안. 화덕의 불이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이 사람은 다음 말을 고르고 있었다. 50년간 고른 말을.


"도망친 지 50년이오. 동료들이 지키려 했던 기록을 내가 가지고 있고, 동료들이 멈추려 했던 순환이 아직 돌아가고 있소. 3년 전에 아자렐이라는 학자가 마왕이 됐고, 젊은이가 용사로 소환됐소."


노르도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이었다. 이 사람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듣는 것이.


"나는 5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여기 숨어서 약초나 캐며 살았소. 동료들이 죽으면서 지키려 한 것을, 나는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었을 뿐이오."


컵을 잡고 있던 작고 마른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50년의 죄책감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속죄가 될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가르칠 수 있소."


가르친다.


"뭘 가르치시려는 겁니까?"


"[언약 밖의 혀]는 시작이오. 거짓말에서 빛이 나오지 않는 것은 마나장과의 연결이 다른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오. 다른 방식의 연결은 다른 방식의 힘이 가능하다는 뜻이오."


다른 방식의 힘. 거짓말이 아닌. 무언가가.


노르도가 마른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진심을 담은 말에 마나를 실을 수 있소. 이 세계에서 진심은... 가장 강한 언약이오."


진심. 리나가 말했다. "진심으로 말해봐." 그것이 단순한 요구가 아니었다는 것인가. 진심에 마나를 싣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 진짜 무기가 된다는 뜻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


"시간이 걸릴 것이오. 그리고... 대가가 있소."


노르도가 말했다. 대가. 이 세계에서 힘에는 항상 대가가 있었다. 맹세의 서에 마나가 드는 것처럼, 거짓말에 빛이 나오는 것처럼.


물어야 했다. 대가가 뭔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들었다. 탑의 순환, 아자렐의 진실, [언약 밖의 혀]의 원리, 진심의 힘.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일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노르도가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입가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눈이 좁아지는.


"감자는 안 캐도 되오."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 줄은 몰랐다. 탑의 순환, 잠식, 대가. 무거운 것들 사이에서 감자 한마디가 빠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웃겼다.


움막을 나오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있었던 것이다. 밭 가장자리에서 돌아보니, 움막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르도가 다시 불을 피운 것이다.


개울을 따라 걸으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해가 등 뒤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정리할 것이 많았다. 탑이 마왕을 만든다. 아자렐은 학자였다. 잠식이 진행 중이다. [언약 밖의 혀]는 소환의 구조적 특성이다. 진심에 마나를 실을 수 있다. 대가가 있다.


리나에게 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기사는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일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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