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났다.
잠을 못 잔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감고 있다가 깨고, 다시 감고, 또 깨는 걸 반복했을 뿐이었다.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하자 포기하고 일어났다.
성벽 위로 올라갔다. 아침 바람이 불었다. 드라가가 밤새 자경단을 돌려 성벽을 바꿔놓았다. 남쪽 성벽에 깃발 열두 개가 꽂혀 있었다. 대장간에서 급하게 만든 것이라 천이 고르지 않았지만, 멀리서 보면 부대 깃발로 보였다. 창과 방패가 흉벽 사이사이에 세워져 있었고, 교대 순찰이 반 시진 간격으로 돌고 있었다. 같은 자경단원이 갑옷을 바꿔 입고 두세 번씩 다른 구간에 나타났다.
남쪽 성벽 중앙 위치에 섰다. 남쪽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다.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는데, 멀리서 보면 위풍당당하게 보일지도 몰랐다. 가까이서 보면 무릎이 떨리고 있었지만.
리나가 왼쪽에 섰다. 갑옷 위에 왕실 기사단 문장이 달린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연기가 아니었다. 진짜 기사였고, 진짜 칼을 쓸 줄 알았다.
"떨고 계십니다."
"바람이 차서요."
"거짓말이시죠."
빛이 나오지 않았다. 리나가 짧게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이 사람이 웃는 걸 처음 봤다. 긴장이 반쯤 풀렸다.
성벽 아래로 마을이 보였다. 어제까지 열려 있던 시장이 절반 이상 문을 닫았다. 마왕군이 온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대장간에서만 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도 자경단 장비를 수리하느라 밤새 돌린 것이었다.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까지 "내가 용사다!" 하며 막대기 검술을 하던 아이들이.
오전 중반, 남쪽 들판에 움직임이 보였다.
"왔습니다." 리나가 먼저 말했다.
언덕 너머로 인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다섯, 여섯. 점점 늘어나 스물이 넘었고, 전부 나타났을 때 대략 서른 명 가까이 되었다. 합류부대 28명에 추가 인원이 붙은 것 같았다. 대열이 정돈되어 있었고, 선두에 깃발이 하나 있었다.
들판 한가운데서 멈췄다. 성벽에서 2리쯤 되는 거리였다. 공격 사거리 밖이었다.
"정찰입니다. 성벽과 병력 규모를 재고 있을 겁니다." 리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에서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깃발 열두 개, 반 시진마다 교대하는 순찰, 흉벽의 창과 방패, 그리고 성벽 중앙에 서 있는 용사. 저쪽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멀리서 보면 200명이 지키는 견고한 성처럼 보일까. 아니면 55명이 허장성세를 치고 있는 허술한 마을처럼 보일까.
답을 알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떨리는 다리로 서 있는 것뿐이었다.
"용사."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카르텐이었다. 이 사람이 성벽 위에 올라온 건 처음이었다. 벽에 기대서 남쪽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온 거요?"
"정찰부대입니다. 본대는 이틀 뒤에 옵니다."
카르텐이 나를 봤다. 관찰이 아니라 확인하는 눈이었다. 시선이 내 허리로 내려갔다. 검이 없었다. 대장간 주인이 선물하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었다. 칼을 쥘 줄도 모르면서 검을 차면 오히려 위험했으니까.
"칼을 안 차고 있소."
"필요 없으니까요."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쓸 줄을 모르는 거 아니오?"
부정할 수 없었다.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게 직업인 사람이 떨리는 다리와 빈 허리를 못 볼 리 없었다.
"맞습니다."
카르텐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처음부터 확인하러 올라온 것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 서 있소?"
"제가 여기 서 있어야 저 사람들이 계산을 다시 하니까요."
카르텐이 남쪽 들판을 봤다. 30명 가까운 무장 병력이 성벽을 살피고 있는 그림을.
"미친 거요?"
"아마요."
카르텐이 오래 침묵했다. 벽에서 등을 떼고 팔짱을 풀었다. 자세가 바뀌었다. 관찰자의 자세에서 다른 것으로.
"수배서는 아직 유효하오. 하지만 마왕군이 이 마을을 밟으면, 수배서를 들고 갈 곳이 없소." 카르텐이 성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장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50닢을 받으러 갔더니 마을이 사라져 있으면 장사가 아니오."
마을이 유지되어야 수배서를 쓸 수 있고, 마을이 유지되려면 마왕군이 물러나야 했다.
"성 아래를 지키겠소. 정찰대가 성벽에 접근하면 상대해줄 수 있소."
카르텐이 성벽을 내려갔다. 리나가 옆에서 나직이 말했다.
"수배서를 든 사람이 성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논리는 맞습니다. 마을이 없으면 수배서도 쓸모없으니까요."
한 시진이 지났다. 마왕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몇 명이 갈라져 나와 성벽 주변을 크게 돌았다. 서쪽과 동쪽 성벽도 확인하는 것이었다. 드라가의 지시대로 서쪽과 동쪽에도 교대 순찰이 돌고 있었다. 빈틈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때가 됐다.
"드라가 자경단장."
성벽 아래로 내려가 본부로 갔다. 드라가가 서신을 이미 준비해두고 있었다. 자경단장 직인이 찍힌 양피지였다.
"내용을 확인하시오."
서신을 읽었다. 크롬홀 자경단장 드라가의 이름으로, 마왕군 합류부대 지휘관에게 보내는 공식 서신. 내용이 격식 있었지만 빈 곳이 있었다.
"여기에 한 줄 넣어도 되겠습니까?"
드라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나에게 펜을 빌렸다. 아르케나 문자를 쓸 수는 있었지만 격식 있는 서신체는 서툴렀으니, 내가 말하고 리나가 적었다.
원래 내용: 왕실 용사 강태호가 크롬홀을 수호하고 있으며, 왕실 기사 리나 카셀이 호위하고 있다. 크롬홀에 대한 적대 행위는 왕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
추가한 내용: 크롬홀은 귀군의 진군 경로에서 전략적 가치가 낮은 거점이다. 양측의 불필요한 소모를 피하기 위해 우회를 권고한다.
거짓말이 두 개 들어 있었다. 첫째, 용사가 수호하고 있다 — 검도 못 쓰는 용사였다. 둘째, 왕국에 대한 적대 행위 — 왕국이 크롬홀을 신경 쓰고 있다는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리나가 왕실 기사인 것은 사실이었고, 그 사실이 나머지 거짓말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마왕군 지휘관이 확인할 방법은 공격뿐이었다. 공격해서 용사가 진짜면 병력 절반을 잃는다.
추가한 문장은 다른 종류의 계산이었다. 위협이 아니라 합리화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전략적 가치가 낮은 거점"이라는 말은 지휘관이 상부에 보고할 때 우회 결정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이 됐다. 용사가 있는 성을 피한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불필요한 거점을 건너뛴 것이라고.
핀의 부하 중 한 명이 말에 올랐다. 서신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흰 천을 창에 매달았다. 전령 표식이었다. 남쪽 성문이 열리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성벽 위에서 지켜봤다. 전령이 점점 작아지다가, 정찰대의 대열 앞에서 멈췄다. 거리가 멀어서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뛰었다. 전령이 서신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상대가 서신을 받아 든 것도. 읽고 있는지, 버리는지는 거리가 멀어서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늘어졌다. 잠시 뒤 전령이 말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무사했다.
"서신을 받았습니다. 본대 지휘관에게 전달하겠다고 했습니다." 전령이 보고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해가 중천을 지나 기울기 시작했다. 정찰대는 여전히 2리 밖에 있었다. 공격하지 않고 관찰만 했다. 기만이 통하고 있는 것인지, 공격 시점을 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성벽 위에 반나절을 서 있으니 무릎에 힘이 없어졌다. 하지만 앉을 수 없었다. 저쪽이 보고 있는 한 서 있어야 했다. 바람이 망토를 흔들 때마다 몸이 같이 흔들렸는데, 저쪽 눈에는 그냥 바람에 펄럭이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교대 순찰이 정확히 돌고 있었다. 핀이 짠 순찰표대로 자경단원들이 성벽 위를 걸었다. 같은 사람이 갑옷을 바꿔 입고 다시 나타나는 것을 저쪽이 알아챌까. 2리 밖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보이지 않기를.
리나가 옆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같이 서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을 때, 정찰대가 움직였다.
대열이 정리되고,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본대에 보고하러 가는 것이다.
인영이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마지막 한 명이 사라졌을 때, 다리가 풀렸다. 무릎이 꺾이려는 것을 겨우 버텼다. 리나가 옆에서 팔을 잡아줬는데, 잡힌 건지 잡은 건지 모르겠다.
성벽 아래에서 누군가가 "갔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경단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안도와 불안이 섞인 소리였다.
드라가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
"갔소."
"네. 하지만 끝난 게 아닙니다. 본대 지휘관이 판단을 내릴 때까지 하루에서 이틀입니다."
하루에서 이틀. 그 사이에 결과가 나온다. 우회하면 이기고, 정면으로 오면 진다. 55명으로 300명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종이 한 장과 깃발 열두 개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성벽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우회하면 어디로 가는 걸까. 크롬홀을 비켜간 300명은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남쪽의 다른 마을로 갈 것이었다. 성벽이 없는, 자경단이 약한, 용사가 없는 마을로. 크롬홀을 살리는 대신 다른 누군가를 밀어넣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55명으로 300명을 상대하면 크롬홀도 못 지키고 다른 마을도 못 지킨다. 지금은 이것밖에 없었다. 핀이 있었던 델라 마을도 그렇게 밀려났을 것이다. 누군가가 막아주지 않아서, 누군가가 다른 곳을 먼저 지켜서.
리나가 옆에서 걸었다. 성벽을 내려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음이 무거운 것이 느껴졌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남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령이 들고 간 서신이 지금쯤 정찰대와 함께 남쪽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종이 한 장이 300명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